[베껴쓰고 다시읽기] '음악'과 '미술' 사이, 시의 본래적 위치 :
郭在九, '沙平驛에서'
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待合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琉璃窓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內面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靑色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歸鄕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和音에 귀를 적신다
子正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雪原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呼名하며 나는
한 줌 톱밥의 불꽃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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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신춘문예 당선작들 중 송기원 시인의 '恢復期의 노래', 그리고 이 곽재구 시인의 '沙平驛에서'만큼이나 유명하고 또 대단했던 당선작들이 최근에도 더 있었을까 싶습니다. 어떤 분은 올해 경향신문 당선작인 박선민의 '버터'를 또는 서울신문 당선작인 임후성의 '볼트'를 꼽기도 합니다만...
한 편의 애틋하고도 쓸쓸한 화폭을 매우 잘 담아낸 빼어난 수작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데뷔작이요 대표작인 이 시를 놓고 김용택 시인은 "한 편의 회화 같다"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갖는 이미지들은 때때로 음악을, 또 때로는 미술을 꽤 닮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경우에도 "시의 한 끝은 아름다움과 추상이고, 다른 끝은 진실과 구체"라면서 전자는 미래를 또 후자는 과거를 향한다고도 시론집인 "무한화서"에서 말한 적이 있었죠... 믿거나 말거나요.
1981년 신춘문예는 그 타이틀 자체만으로도 이미 '오월'과 '광주'라는 문맥을 그저 묵묵히 상징할 뿐입니다. 대표적인 '오월시' 동인이기도 한 시인이 다녔던 학교와 그해 오월의 기억만큼은 비단 이 시 한 편으로도 모자랄 거대한 산맥이요 그 어떤 한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황지우 시인 역시 무려 십여 년이 지난 후에야 네번째 시집인 "게 눈 속의 연꽃" 중에서 '華嚴光州'를 통하여 그 아픔을 토해냈던 바가 있고요.)
참고로, 신춘문예의 원작과 비교해 데뷔시집인 창비의 "사평역에서"에 실렸던 표제시는 살짝 그 모양새를 달리 합니다. 시인들도 끊임없이 '퇴고'를 하고 있습니다. (끝 구절이 조금 다른 이유예요... ※ 원작 : "한 줌 톱밥의 불꽃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개작 :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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