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등단을 해도 첫 시집은 또 20년 (박미란, 목재소에서) :
목재소에서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도 눈이 부시다
#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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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77.
1995년은 이병률 시인이 등단한 해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등단자들 명단을 살펴보니 대충 이렇네요... 김지연 (동아), 윤을식 (세계), 윤지영 (중앙), 이병률 (한국), 이은옥 (경향), 장경복 (서울) 정도인데 실제로 현 문단에서 아직까지 시집을 펴내고 활동하고 있는 시인은 한 명 정도 뿐이겠어요. 실제로 등단을 한다 해도 끝까지 살아남아 작품활동을 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매년 1월 1일, 종이로 된 신문들을 가판대에서 모두 사모은 다음에 하루종일을 각 신문마다 발표된 당선작들을 내내 읽고 또 감상평을 써내곤 하던 시절들도 기억을 돌이켜보니 이 해가 맨 마지막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후부터는 직장생활로 꽤 바쁘게 지냈으며, 또 인터넷이 생긴 다음부터는 아예 제대로 시간을 내면서까지 읽어둔 적이 없었으니까요.)
1995년 1월 1일에 제가 뽑았던 그해 최고의 작품은 간호사 생활로 이미 수해째의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한 여성이었고,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져버린 무슨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던 중이었던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연말까지 인테리어 공사로 휴관 중인 정독도서관을 거의 매일같이 방문하였던 지난 봄에 비로소 그의 첫 시집을 읽었던 게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등단한 지 무려 20년만에야 펴낸 그 시집에서도 온통 직장생활에 관한 (즉, 생사를 오가던 병동에서의 아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중심이 된) 시편들에 온통 지면을 할애했음에도 반갑게 상봉하게 된 데뷔작만큼은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더군요. 황동규 시인의 심사평을 의식한 듯, 살짝 수정된 버전이 실렸었는데 모처럼 등단작을 다시 꺼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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