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과거의 '회상'으로부터 미래의 '예견'까지 (박준, 여름의 일) :
여름의 일
- 묵호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비가 쏟고 걸음이 질척이다 멎고 마른 것들이 다시 젖을 때의 일입니다 배를 타고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와 침과 욕과 돈을 길바닥으로 내던질 때의 일입니다 와중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어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아니 갈 곳 없는 이들만 떠나가고 머물 곳 없는 이들만 돌아오던 때의 일입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일로 당신으로부터 조금 이르게 멀어져보기도 했던,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
#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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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김소월과 김영랑, 그리고 허수경과 이병률? (개인적으로는 박형준) 신형철 교수가 박준의 시를 보면서 떠올린 이름들입니다. 백 년의 역사를 갖는 현대시에 대해 "서정의 근본형식이 회상"이라는 말을 끄집어낸 건 돋보이는 지적이겠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신형철 교수가 언급하지도 않았던 미당, "현존하는 미당"이란 평을 듣던 정호승, 또 "여전히 잘 팔린다"는 문태준과 나희덕, 안희연 등도 같은 맥락에 놓고 함께 읽어볼 시집들이겠습니다.
현대판 '연금술사'라는 칭호를 과거판 '계관시인'처럼 생각해본 적 있었는데, 가장 섬세히 시어를 선택해 잘 배치된 문장들은 항상 아름다운 편입니다. 또 박준의 시들은 그 아름다움의 한 경지를 구현한다는 면에서는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아도 무방하다고 보는 편입니다. (그가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을 했고, 창비의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게 이상하다고 느껴진다면 딱 그만큼이 보는 이들 스스로가 갖고 있던 지독한 편견일 따름입니다.)
유독 이문재 시인과도 친한가 봅니다. 이 시집에서도 "이문재의 취한 말"이 등장했는데 실은 두 시인의 얼굴들마저 좀 닮은 구석이 많게 느껴지곤 합니다. 세상을 진실로 살아가는 몇 안되는 이들의 눈빛은 숨길 수 없는 선량함을 갖습니다.
시를 읽다가 문득 최근의 일들 여럿이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이 빗속을 뚫고 종로 한복판을 걸었고 또 누군가는 설레는 심경으로 귀갓길을 걱정해주었습니다. 딱 그만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본 때입니다.
비가 추적추적 계속 내리는 새벽입니다. 태풍이 잦아드는 모양입니다.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쓰레기통에 구겨지던 그때의 그 습작들도 함께 잊혀질 무렵의 일입니다.
P.S. 문학회 동기들이 몇년만에 함께 모여 육십첩반상이라는 연안부두의 한 횟집을 작정해 방문하고자 인천터미널에 제일 먼저 도착해 한시간 가량을 기다리다 새로 나왔다며 읽고 샀던 한 시집을 추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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