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김수영의 시론과 변증법적 상상력, '화엄'과 '자본' 사이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8. 6. 05:58




[베껴쓰고 다시 읽기] 김수영의 시론과 변증법적 상상력, '화엄'과 '자본' 사이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 도
  영하 이십 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 도 영상 십삼 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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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는 가장 '김수영문학상'에 잘 어울릴 법한 시인으로 황지우를 꼽곤 했습니다. 박노해 시인과 함께 <시와 경제> 동인 출신이기도 한 그의 가족력에서는 '혜당' 스님과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를 쓴 정인 작가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그의 형과 아우였던)
  사실 시세계가 얼추 완성된 격인 네번째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에서 드러냈던 '화엄경'에의 열망은 또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1998년의 마지막 시집인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에 나타나던 마르크스의 '자본'까지를 한데 아우르는 장대한 산맥을 펼쳐보이기까지 했습니다.
  - 산경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화엄광주 (이상 "게 눈 속의 연꽃" 중)
  - 뼈아픈 후회
  -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등등의 시편들도 매우 중요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미 전작들에서부터 비롯된 힘의 크기가 워낙 막강했었다는 기억을 함께 갖습니다. (이들은 주로 오늘 소개하는 시집과 풀빛에서 나온 "나는 너다" 등을 포괄하겠죠.)
   제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이어 민음사에서 출간된 두번째 시집의 이 표제작은 한때 낭만적인 뉘앙스로 서울 곳곳의 커피숍에서는 메뉴판의 배경들로 쓰이기도 했었죠. (100만부 이상 팔린 시집들이 즐비했었던, 시가 가장 대중화된 시절이기도 했으니까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직렬적'인 형태로의 형상화를 시도하는 그의 시 스타일이 잘 드러난 이 시에서 "나무"는 곧 '시'요 '사상'이자 '시인' 내지는 '인류'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온몸"으로 "헐벗고" 또 "벌 받는" 목숨은 "애타면서", "불타면서", "거부하면서", 또 "부르트면서"도 "막 밀고 올라"갑니다. "끝끝내"는 "온몸으로" "꽃피는" 나무입니다.
   대뜸 떠오른 게 김수영의 시론입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는 그래서 세상을 향해 "침을 뱉"습니다. 나와 너, 우리를 한데 아우르는 시정신이야말로 김수영과 황지우를 관통하는 가장 큰 교집합이 아닐까 합니다. 또 이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적 상상력을 오롯이 품는 대표적 수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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