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윤후명, '소설가 Y씨의 하루' (글이라는 숙명에 관하여)

단정, 2025. 5. 9. 20:13

 
 
 
   소설가 Y씨의 하루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요즘은 안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꽃을 가꿔 식물학자 흉내도 내고 
   술을 마셔 고래 흉내도 내며 
   세상을 거꾸로 보려 하지만 
   사랑이 그를 가로막는다 
   아무리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가도 
   사랑이 바로 보라고 꾸짖기 때문에 
   그는 늘 불안하다 
   그래서 꽃 피면 꽃 지면 한잔하자고 
   누구에게나 보챈다는 것이다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헛소문일지도 모른다 
 
 
   # 윤후명, 쇠물닭의 책 (서정시학, 2012) 
 
 
   ... 
 
 
   글이라는 숙명에 관하여 : 
 
 
   윤후명 시인께서 작고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꺼내놓는 시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설가 Y씨의 하루'인데, 1967년 경향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해 10년 만에야 첫 시집인 <명궁>을 내놓은 후부터 지금까지 오히려 시인보다는 소설가로 훨씬 더 큰 명성을 떨친 분이기도 하죠. (강은교, 김형영 시인 등과 함께 '70년대' 동인 활동을 한 이력도 실은 새롭습니다.) 
   대학 면접시험에서 "왜 철학과를 지망하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게도 "시를 쓰려고요"라고 답한 한 학생이 한평생에 걸친 시작활동과 소설가로서의 집필활동을 마무리한 채 생을 마감한 소식은 그가 걸어온 족적들과 시에 관한 태도들로, 이를테면 "외국에서는 시와 소설을 같이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풍토가 안 돼 있어서 그 점이 매우 아쉬웠어요. 나이가 되니 이제 그런 것을 극복할 때가 됐다, 제가 합치는 역할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는 인터뷰만으로도 갈음할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역시 엄연히 첫 발걸음은 소설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니까요. (제가 줄곧 "한강 작가"가 아닌 "한강 시인"이라고 명명하는 까닭이기도 하죠.)   
   시를 쓰는 사람은 분명히 외롭습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아무도 읊어주지 않는 시를 쓰면서도 꿋꿋이 그 시절을 견뎌낸다는 일 자체가 이미 힘든 일이요, 분명히 그 과정 중에 와닿을 여러 유혹들을 애써 물리쳐온 인내심도 보통 고집은 아닐 테니까 더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고독에 대해 굳이 위로까진 아니더라도, 일부러 폄하하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른 '평가'를 내리기에 주저해 온 까닭은 그저, 역시, 사실은 그렇습니다. 
   한 시인의 생애를 지켜보면서 그 다음 시인의 생애를 예감해 보는 일은 적잖이 쓸쓸한 편이기도 합니다.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그 생애를 또 한차례 더 지켜보면서 또다시 속된 응원의 한마디를 건네보는 일 역시 비슷한 류의 '피로'를 느낄 법한 일이겠습니다만... 늘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시로써 존재하고 또 그 시를 통하여 단 한 사람의 생에라도 자그마한 위로 한 줄을 건네줄 수만 있다면, 시 한 편이 갖는 효용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대신할 수 있기에 그 결코 작지 않을 '가치'를 이미 안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방관하지도 못할 소소한 일들이 그저 하루를 지탱해 온 또는, 하루를 억겁의 연처럼 무거이 받아들일 법한 소식이기도 할 일이겠어서 몇 줄을 그래도 적어놓겠습니다. 
   편안한 저녁시간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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