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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덕,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 주목할만한 몇)

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어릴 적 나를 괴롭히던 기분들은 나도 모르는 새 다 타 버린 것 같아 환하게 타고 있는 지금의 낮과 밤 아직 대가 단단한 꽃처럼 소리 지르는 끝나 버렸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분들과 그것은 가끔은 속도를 맞추어 검은 연기를 내뿜지만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어릴 적 살던 집에서 하던 실제의 저녁 산책들처럼 자유롭고 폐쇄적인 방식으로 이어지던 마당에 끝없이 심긴 야생 꽃들처럼 어린 나의 주위에 차가운 원을 그리며 떨어졌던 재는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만 눈에 띄게 남아 나의 중심에 질서 있는 모양으로 흩뿌려져 있어 그것의 U자 형태는 1999년의 마당과 닮아 있어서 나는 언..

문학노트 06:37:48

임경섭,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4월 중순의 눈꽃)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발견한 뒤부터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안다고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와 마주한다 또 다른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다 어? 어떻게 내가 모르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두 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처음 들은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만이 유일한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라 여긴다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도처에서 태어나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당신의 사방에 놓여 있지만 당신은 당신의 처음 그 ..

문학노트 2025.04.14

이기성,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한 시에 남아 있는 것 항상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네게 종이를 한장 건네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음을 깨닫고 돌아보지만 너는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이고 정작 쓰지 못한 마음은 주머니 속에서 쓰디쓴 돌멩이처럼 굴러다닐 때 시계는 정지하고 남아 있는 것은 박동하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에도 남아 있는 것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 네가 떠난 뒤에도 남은 것 어둑한 너의 눈동자처럼 아직은 있는 것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 # 이기성, 감자의 멜랑콜리 (창비, 2025) ... 시를 쓴다는 일에 대해서 : 요란한 밤비가 그친 후에도 벚꽃들의 안부가 궁금해 잠시 바깥을 다녀왔습니..

문학노트 2025.04.13

이동욱, '폐선' (등단 18년, 2권의 시집)

폐선(廢線) 내 몸엔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누군가 뛰어온다. 걸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의 뽐내는 걸음걸이를 보았으면, 춤추듯 공중에서 두 발을 모으는 자세를 기대했지만 그는 뛰어오고, 그는 너무 빨리 그가 남긴 것은 모두 그를 사라지게 한다. 혹은 사라지기 전에 그는 뛰어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가 달려가는 곳이 어딘지, 내 몸은 알지 못한다. 그는 뛰고 있을 때만 존재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 심장에 닿고, 허파를 지나 팔뚝과 허벅지를 긁으며 어딘가 잠시 머물러 있다. 그는 나를 만나고 싶을 것인가. 나도 나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

문학노트 2025.04.12

장석남, '내가 사랑한 거짓말' (망명에서 돌아온 '서정시'의 세계)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살아왔다 나는 살았다 살고 있고 얼마간 더 살 것이다 거짓말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거짓말 나는 어느 날 사타구니가 뭉개졌고 해골바가지가 깨졌고 어깨가 쪼개졌고 누군가에게는 버림받고 누군가에게 구조되었다 거짓말, 사실적인…… 그러나 내가 사랑한 거짓말 나는 그렇게 내가 사랑한 거짓말로 자서전을 꾸민다 나는 하나의 정원 한창 보라색 거짓말이 피어 있고 곧 붉은 거짓말이 피어날 차례로 봉오리를 맺고 있다 거짓말을 옮기고 물을 준다 새와 구름이 거짓말을 더듬어 오가고 저녁이 하늘에 수수만 년 빛을 모아 노래한다 어느 날 거짓말을 들추고 들어가면 나는 끝이다 거짓말 내가 사랑할 거짓말 거짓이 빛나는 치장을 하고 ..

문학노트 2025.04.11

백가경,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메타버스'에서의 시학)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문학노트 2025.04.10

김주연, '겨울과 봄 사이' ('평생직업'은 스스로 증명하는 일)

겨울과 봄 사이        외우(畏友) 지하가 그려준     그림 속의 난이 베란다 안쪽에서    힘차게 웃고 있네    그림 속 자연은 언제나 청춘    오랜만에 들려온 영상 10도 소식    외투 벗고 나갔다가    오싹- 도로 들어왔다    겨울과 봄이 함께 내 안에 있을 줄은      * 김주연, 강원도의 눈 (문지, 2025)      ...        '평생직업'은 스스로 증명하는 일 :         김현 선생과 함께 엮어낸 는 문학도들의 입문서로 가히 '고전'이라 할만큼 대단한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976년에 나온 이 책이 이제 벌써 초판을 발행한 지도 50년이 다 돼갑니다. 지난 50년 동안 이 책을 통해 문학을 처음 접했거나 또는 '체계적인 커리큘럼'이라는 타이틀로도 접했을 숱..

문학노트 2025.04.09

박준, '지각' (늦은 때가 가장 이른 섭리)

지각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인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     나는 나무 밑에서 미안해하고    나는 호숫가에서 뉘우치며    나는 비탈에서 슬퍼한다     이르게 찾아오는 것은    한결같이 늦은 일이 된다      * 박준, 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 2025)      ...      늦은 때가 가장 이른 섭리 :      박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비로소 출간됐다는 소식을 공교롭게도 책을 펴낸 출판사 광고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카카오톡에서 우연히 채널 알림창을 열었는데 시인의 출간 소식을 접한 심경은 무덤덤함과 반가움과 '이제서야?' 같은 궁금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나 봅니다.    21세기, 즉 2000년 이후로 가장 ..

문학노트 2025.04.08

이장욱, '농담' (4월의 시작, 새로운 한 주)

농담 후회가 전화를 걸어와서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나는 반가워서 후회를 만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함께 산책을 했는데 후회가 자꾸 이상한 농담을 해서 나는 말했다.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당신이......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압력솥 안의 쌀알처럼 들끓었는데 창밖의 태풍인 듯 휘몰아쳤는데 세월이 흐르자 흰 그릇에 담긴 밥처럼 고요한 밤하늘처럼 무심해졌지. 후회가 한 농담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 그런데 그건 눈 내리는 밤의 고독한 사람에 대한 농담이었을까?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농담이었을 텐데 그런데 왜 나는 그토록...... 십년 이십 년 삼십 년이 지난 뒤에 나는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

문학노트 2025.04.07

글을 쓴다는 것은 '정치력'의 발현

글을 쓴다는 것은 '정치력'의 발현 어제 한 지인과의 대화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정치력' 확보 차원이라고 말했는데, 스스로 이 말을 곱씹어본다 확장 또는 확대까지를 염두에 둔 이 '확보'는 다시 말해 입지를 갖는다는 뜻인데, 그건 책을 내고 독자를 얻고 또는 도서관에 입성을 하고 무슨 무슨 문학상을 탔다거나 또 심지어는 어디 어디에 출마를 하는 행위들까지도 모두 망라해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고도 말하였다 실제로 그러한가? 스스로한테 이 질문을 던져본다 발터 벤야민이 쓴 에서도 결국 현대예술이 스스로의 '아우라'를 잃어가는 동시에 인간이 이를 얻고자 한다면 그건 바로 '정치력' (대부분 이를 일상적 표현으로 '영향력'이라 말하지만 엄밀하게) 확보라는 면일 거라고..

개인노트 2025.04.02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봄의 안부, 온다고 함)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醮禮廳)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곰나루 : 충남 공주에 있던 나루. 동학 농민군이 최초로 봉기한 곳 * 초례청 : 전통 혼례인 초례를 치르던 장소 * 신동엽, 52인 시집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 신구문화사 1967) ... 봄의 안..

문학노트 2025.04.02

T. S. Eliot '황무지 The Waste Land' (4월은 잔인한 달이 되지 않기 위해)

황무지 The Waste Land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I.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

문학노트 2025.04.01

이장욱, '아침들의 연결' (3월의 끝, 4월의 시작)

아침들의 연결            나는 어제 아침에 일어났다가 오늘   아침에 다시 일어났다.   그것은 누가 죽어가는 긴 하루와 흡사하였다.​     창밖은 창밖끼리 모두 이어져 있는데   19층의 창문들이 조금씩 다른 창밖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여기서 바라보니까 누가 저기서   이쪽을 바라보는 것​    바깥인데 거기서는 안인 곳에서 휙   사라지는 사람이 있는 것   어느 날 바라보면 문득   뒤집힌 호주머니처럼​    나는 초원 한가운데 놓인 침대에서 깨어났다.   죽은 영양과   영양을 뜯어먹는 하이에나들 사이에서​    방을 잃어버리고   어려운 적을 잃어버리고   살과 뼈가 구분되지 않는 곳에서​    오늘 아침에는 세상의 창밖들이 모두 이어져서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 나에..

문학노트 2025.03.31

박노해, '인디언의 기우제' (가능성 100%는 단지 "시기"만의 문제)

인디언의 기우제 대지에 가뭄이 들고 생명이 타 들어갈 때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지낸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기적처럼 비가 내린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까 나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져 왔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해서가 아니라 기도 중에 내 헛된 바람은 사라져 버렸으니까 지금 나에게는 간절한 바람이 있고 나는 그것 하나를 위해 온몸으로 기도중이다 나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왜냐면, 그건 하나의 기도가 아니기에 나의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하루하루 꾸준히 내 목숨을 다하도록 밀어 나갈 테니까 * 박노해, 나눔문화 (2015년 10월 27일) ... 가능성 100%는 단지 "시기"만의 문제 :..

문학노트 2025.03.27

송경동, '무허가' (리얼리즘 시가 갖는 미덕)

무허가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    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    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    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점거하고    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을 두번이나 점거해    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    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    그런 내 삶처럼    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    이 세상 전체가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 시인의 말 :      우연히 오게 되었지만......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 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

문학노트 2025.03.26

최백규, '향' (처연한 MZ세대의 정서)

향    - 1992년 여름      멀리 금호강 너머로 불꽃을 터뜨리는 학생들이 떼 지어 몰려다녔다       공장에서 돌아온 영은 늦은 저녁상을 물린 뒤 주말 오후에 시내 쪽으로 나가볼 궁리를 하며 마루에 누워 있었다 태운 편지를 먹고 자란 하중도의 유채꽃마저 긴 숨을 내쉬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왠지 계속해서 젖어가는 밤이 있었다     막차에서 내린 선은 만삭의 몸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채 지지 않은 유채꽃을 들여다보다 꽤 근사한 기분에 눈물이 돌았다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을 깨서라도 약을 늘려야겠다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영이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곧 태어날 내가 꿈결에 아버지를 부르면 수화기를 든 영이 돌아보았다    아랫목에는 그의 늙은 아버지만이 잠들어 있..

문학노트 2025.03.23

차호지, '사랑하는 사람' ('영향력'이 제시할만한 '미래'의 힘)

사랑하는 사람      그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길 속을 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늦가을 밑동만 남은 수수밭에 불을 지르고 그 위를 걸었다. 그는 그 때문에 그곳에 갇혔으나 내게 마음의 짐을 가지지 말라고 말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나는 그 편지를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그에 관여했다. 그와 내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게 진짜 사랑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이미 증명을 마친 수학자의 얼굴로 나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는 나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내가 울면서 하는 말을 주의 깊게 ..

문학노트 2025.03.19

박준, '문득 그 식당이 생각났다' ('실패'에 관한 위로의 글 한 편)

문득 그 식당이 생각났다 따뜻한 인심이라든지 노동하는 사람들 특유의 부글거리는 생동감 같은 게 아니라, 그런 도식적이어서 죄스러운 수사들 때문이 아니라, 그 실험대 위를 비추는 마냥 쨍했던 형광등 아래, 닦아도 어쩐지 눅진눅진한 나무 식탁에서, 그토록 울고 싶었던 네 생각을 하면, 그 날의 식당이 꽤 든든한 위로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여느 24시간 운영하는 대형 식당처럼 아무도 옆 테이블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뚝배기에, 술에 젖은 대화에 집중하는 곳, 탁 트인 높은 천장으로 인해 조금만 떠들어도 마구 공명하는 소리들, 하지만 그 탓에 시끄러운 말소리 사이로 울음을 터뜨려도 될 것만 같은, 그곳은 소음으로 감싸 안긴 은신처 같았다. 그래서 할 말 못할 말 다 해가며 눈물의 눈물, 그..

문학노트 2025.03.15

박형준, '이 봄의 평안함' (문예지를 추억하는, 또 다른 봄)

이 봄의 평안함                강이나 바다가 모두 바닥이 일정하다면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깊이가 같을 것이다    그러면 나무의 뿌리가 땅 밑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허공을 물들이는 잎사귀의 춤 또한 일정할 것이다    저기 나무 속에서 사람이 걸어나오도록 인도하는 것이    봄이라면    마음속에서만 사는 말들을 꺼내주는    따뜻한 손이 또한 봄일 것이다    봄꽃들은 허공에서 우리를 기쁨에 넘쳐 부르는 손짓이며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면    우리 또한 그처럼 잊힌 누군가를 향해 가리라         * 박형준,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창비, 2020)       ...           문예지를 추억하는, 또 다른 봄 :        바야흐로 봄입니다.    화이..

문학노트 2025.03.14

이성부, '봄' ('리얼리즘' 시가 갖는 미덕)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우리들의 양식 (민음, 1974)              ...                 '리얼리즘' 시가 갖는 미덕 : ..

문학노트 2025.03.13

허수경,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도시에서의 '인연'이 갖는 고독)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돌았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면서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전철문을 나서며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맨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

문학노트 2025.03.12

박정대, '어제' (이별을 대하는 현명한 자세)

어제 어제는 네 편지가 오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적막한 우편함을 쳐다보다가 이내 내 삶이 쓸쓸해져서, , 李賀의 를 중얼거리다가 끝내 술을 마셨다, 한때 아픈 몸이야 술기운으로 다스리겠지만, 오래 아플 것 같은 마음에는 끝내 비가 내린다 어제는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슬펐다, 하루 종일 환청에 시달리다 골방을 뛰쳐나가면 바람에 가랑잎 흩어지는 소리가, 자꾸만 부서지려는 내 마음의 한 자락 낙엽 같아 무척 쓸쓸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면 메마른 가슴에선 자꾸만 먼지가 일고, 먼지 자욱한 세상에서 너를 향해 부르는 내 노래는 자꾸만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한다 어제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슬펐다, 네가 너무도 보고 싶어 언덕 끝에 오르면 가파른 생의 절벽 아래로는 파도들의 음악..

카테고리 없음 2025.03.11

송경동, '연루와 주동' (형식과 내용에 관한 변증법)

연루와 주동 그간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다 더 연루될 곳을 찾아 바삐 쫓아다녔다 연루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 주동이 돼보려고 기를 쓰기도 했다 그런 나는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어디엔가 더 깊이깊이 연루되고 싶다 더 옅게 엷게 연루되고 싶다 아름다운 당신 마음 자락에도 한 번쯤은 안간힘으로 매달려 연루되어보고 싶고 이젠 선선한 바람이나 해 질 녘 노을에도 가만히 연루되어보고 싶다 거기 어디에 주동이 따로 있고 중심과 주변이 따로 있겠는가 * 송경동,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창비, 2022) ... 형식과 내용에 관한 변증법 : 애석하게도 오늘 쓰려는 글의 ..

문학노트 2025.03.09

안현미, '시간들' (침묵의 시간들 앞에 놓인 인연의 가파른 미래)

시간들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문학노트 2025.03.08

신경림, '파장'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신경림, 농무 (창비, 1975)       ...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 :           신경림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한 해가 다 되어..

문학노트 2025.03.07

황유원, '별들의 속삭임' ('포스트 황인찬'을 향한 아쉬운 기대감)

별들의 속삭임         시베리아의 야쿠트인들은    입김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공중에서 얼어붙는 소리를    별들의 속삭임이라고 부른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어본 건 아마    야쿠트인들이 처음이었을 거다    그들 말고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소리에    별들의 속삭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 없었을 테니까     너무 춥지 않았더라면    너무 추워서 하늘을 날던 새들이 나는 도중 얼어    땅에 쿵,    얼음덩어리로 떨어질 정도가 아니었더라면    별들은 속삭이지도 않았을 거다     별들의 속삭임은 가혹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가혹한 lo-fi 사운드    그것은 가청주파수 대역의 소리를 원음에 가깝게 재생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아름다움이고     별들의 속삭임을 듣는 자는 시..

문학노트 2025.03.05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현대시'에 부합하지 않는 '서정시'의 미덕)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문지, 2024)       ...         '현대시'에 부합하지 않는 '서정시'의 미덕 :        ..

문학노트 2025.03.04

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추억과 슬픔의 형상화가 갖는 무게감)

오래된 여행가방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팰리건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

문학노트 2025.03.03

가을, 밤부터 새벽

가을, 밤부터 새벽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새벽은 이제 선선해졌나 봅니다 제 마음도 곧 선선해지려나 봅니다 서늘해지려면 아직은 좀 멀었고요 뒹구는 낙엽 몇 장을 무심코 밟으면 철 지난 노래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새로운 음악은 아직 떠오르지 않고 가을의 침묵이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낙엽이 떨어진 자리를 보았습니다 밤의 정지 버튼은 보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는 밤 #

글/습작 2024.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