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그 풀이 뚝, 뚝
끊기는 소리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의 굽은 오른 손은
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펴져
나무처럼 자라오른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이제는 한가한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게 된 나는
저 양들을 보며 비로소 무언갈 깨달아간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연주는 얼마나 놀라운가
풀 한포기 없는 방을 풀밭으로 만들어 놓고
천장을 본 적 없는 하늘빛으로 물들이는 이 연주는,
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을
스르르 잠들게 하는 이 연주는!
음악은 연주와 더불어 잠이 들고
양들도 이젠 다들 풀밭에 무릎 꿇은 채 그만
잠이 들어
풀 뜯는 그 모습 더는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이제 한동안 음악 없이도 양들이 한가로이 풀 듣는 모습
머릿속에 그릴 줄 알게 된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나는 그 풀이 된다
* 바흐 「사냥 칸타타」 BWV 208에서
# 황유원, 하얀 사슴 연못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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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마지막 날 :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가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틀에 걸쳐 실시됩니다.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전언에 대고 "그건 무언가를 '조기종식'하고픈 마음들이 모인 탓"이라며 애써 얼버무리긴 했지만, 아침 일찍부터 긴 대기줄에 서서 투표를 기다린 심경 또한 여느 사람들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월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문단 내부의 일정만으로는 (우체국들이 오늘까지만 문을 여는 관계로) 2025년 창비 신인문학상 응모 마감일이기도 하죠. 이 글을 쓰자마자 저도 부리나케 원고를 출력하고 어쩌면 해마다 연례행사가 될지도 모를 또 한 차례의 등기우편을 부치러 우체국으로 향할 예정이기도 합니다. 해가 거듭되수록 이 일은 그 어떤 '공모전' 따위보다는 일종의 '순례길' 같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습니다만...
바야흐로 유월이 다가옵니다. 마지막 주말인데, 잘 마무리하고 좋은 기억들을 심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투표에 관한 여러 비유나 표현들도 많겠지만 오늘 아침에는 굳이 "꽃씨"라고 한 번 명명해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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