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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구체화된 시작 4

구체화된 시작 4 - 베이스라인 터치, 아니고 포스아웃. 아빠, 저게 뭐야 아들이 묻는다 TV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한다 한국시리즈 7차전을 집에서 본 일도 벌써 십년전 홈으로 질주하던 주자를 아웃시킨 모양이다 응, 베이스라인 터치 그게 뭔데 무심코 내뱉는 말에 스스로 자문한다 그게 뭐지 베이스라인은 말이야, 경영계획의 기준점인데 시나리오별 사업계획에서 약간 아래쪽인데 그렇다고 워스트는 아니고 또 망상은 제거하고 잘되면 좋지만 아님 말고 식? 그래도 최소한 지켜낼 약속 같은 거야 베이스라인은 사실 그걸 뜻해 야구에서는? 하얗게 그어놓은 선 보이지, 저게 베이스라인이야 일이미터 떨어져 달리면 아웃이야 기준선을 벗어났으니까 그럼 저 주자는 살아야 맞잖아 기를 쓰고 저 선을 따라 뛰느라 넘어졌고 홈을 터치했어 ..

2021.12.18

[시] 구체화된 시작 3

구체화된 시작 3 - 땅끝이 여물어가는, 봄이 오는 소리. 모두가 안다 봄은 기어코 온다는 것을, 또 겨울이 지배한다는 것을 하나둘 그 봄을, 겨울을 언급할 때면 이마에 이슬이 맺히곤 했어 우도, 옥빛 바다를 삼킨 선착장에도 때 이른 봄바람은 일었을까 각자의 이별을 지탱한 세월이 하수상해 주소록을 하나씩 지운다 그렇게 이별에 익숙해져간다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일 텐데 지구온난화 탓이야, 제각기 한마디씩 거든다 이내 잊는다 봄이 기어코 올까? 이마를 닦고 한숨 고르면 잦아드는 숨결 지난 달력만큼 익숙해버린 생경함에 다시 거칠어져만 간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야 스스로를 위로했던 서글픔인데 늘 연약하기만 한 우체통 속, 찬란했던 몇 마디의 인사 뿐 바람이 또 일었나 보다 기어코 다가온 봄 앞, 무중력 상태가 ..

2021.12.18

[시] 구체화된 시작 2

구체화된 시작 2 - 동의는 협동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회사가물적분할을통보했고임시주주총회를열어의결을또강행했다 노조위원장이코끝시린길한복판에서일인시위를했고응원을받았고 대다수직원들은난방이잘된사무실에앉아회의를했고보고서도썼다 퇴근길헤드라인에저마다안부를걱정했지만더러이직소식도들렸고 네이버가노조를만들때도이랬겠지하며다들애써태연한세밑풍경은 연초부터닥치게된구조조정의칼끝에서댓바람마냥냉랭하기만하다 정부가국민연금고갈대책으로내건방편이라며정년연장을또꺼냈고 실제로환갑을넘긴선배단한명도없는데청년들의일자리도문제인데 다가올그순간만을위해일상전체가구직이된세상이과연행복한걸까 전철역앞예전명예퇴직자의포장마차는오늘또한안녕한가를되묻고 당장주말에있을약속부터무기한연기한채터벅터벅걷는골목길에서 전화한통울렸다잘지내냐네잘못지냅니다그러냐나도그래안녕하자 여왕개미한마리..

2021.12.18

[시] 구체화된 시작 1

구체화된 시작 1 - 부제는 없다. 이의 반론은 독자에게 국한된다. 오후 아스팔트 아스팔트먼지를일으키는 청바지 곧은다리 물기있는그림자 봄에만난인사가저렇듯사라지고 사라진자리마다반짝거리는흔적 머물지못한사람들틈새로빠져나간햇빛 빨랫줄에걸렸던청바지 구두밑창에해가걸렸다 구두굽을고쳐신는동안 눈앞옥상첨탑에쪽지로꽂힌석양 시계를쳐다보니지폐한장남았다 잠시머물러있는동안바람이분다 서늘한바람 일찍떨어지는해를애도하며 공사중인팻말을피해걷는다 다시또골목 골목안에떨어진지폐를줍는동안 금세어둑해진그림자 눈물겹던인사가바람에흩뿌려져 햇빛을닮던안부도자취를감춘곳 또각 성큼 성큼 또각 또각 성큼 성큼 성큼 또각 또각 성큼 성큼 성큼 또각 또각 성큼 성큼 또각 또각 또각 성큼 성큼 또각 성큼 또각 성큼 성큼 또각 성큼 성큼 휘청 한다 구두밑창에돌가루..

2021.12.18

[시] 고요한 저녁-밤까지

고요한 저녁-밤까지 새벽 두시 시린 발가락을 주무르다 보면 랩 유행가 틀어놓은 승용차가 지나고 다시 정적-고전주의의 시대 도래한다 벌써 12월인데 발가락은 시리다 어젠 비도 내렸어 가히 폭력적이군 넷플릭스로 틀어놓은 좀비 영화처럼 싸늘하게 미소짓는다-겁이 난다 한 이틀 여행을 떠나고파 삭막한 도시를 피해 떠난 그 다음날 풀죽어 돌아온 청년은 더욱 싫어져 어서 빨리 늙어갔으면 그래, 한 쉰살쯤 먹고 나면 입가에도 주름진 긍정을 담을까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어 졸립군 참 여기까지야 새벽 네시 마른 얼굴을 문지르다 보면 어느새 눈시울 뜨겁고 간밤 속 쓰렸던 기억들은 말 못한 사연들로 묻어둬야지 또 그래야지 하며 타협하고 다시 정적-담배 하나 꺼내 문다 빗소리가 그친 새벽처럼 달이 다시 뜨고 날이 밝는다 ..

2021.12.16

[시] 실로암 합창단

실로암 합창단 푸석푸석한 지하도 계단을 올라서면 뜨거운 햇빛 그 밑에서 유니폼을 맞춘 소녀들이 다시금 모여 서서 온갖 율동과 가느다란 일렬횡대의 목청을 돋울 때 내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가시처럼 돋아나는 담배 먼 고향을 떠나온 목동들이 십자성을 향해 내뿜던 그 푸른 그리움의 몸짓을 익히 알아온 터였다 지금은 목이 마르고 내 구두 밑에 심지로 박히는 저 뜨거운 염증의 기억을 나는 곱씹고 있는 건가 지휘를 맡은 아이의 어깨엔 금박 휘장 자랑스럽다 기차표를 예매하는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들의 어깨 옆을 스치는 내 목덜미에 힘줄이 솟고 발걸음도 무거운 채 흘깃 쳐다보는 행인들 사이엔 희미한 무지개가 살포시 피어오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 속 십자가가 거꾸로 매달린 때 나도 저 대열을 이탈하고픈 유혹..

2021.12.16

[시] 저녁상 앞에서

저녁상 앞에서 김명인 시집을 읽다 죄 노른자 투성이인 시들 속에 내가 찾던 비애는 함께 삶아져 저리도 노릇노릇하게 변색한다 먹다 남은 빵이라도 구워낸 걸까 아니면 혹 밤새 내리던 비처럼 축축이 젖었기만 한 냄새였나 친구들 오간 흔적, 우유갑만 남아 사흘째 방안을 내내 뒹군다 한때나마 시를 쓰려고 했었지 그런 식으로 파묻혀보고도 싶었어 비에 젖은 창문, 긴 골목이 흐르고 자동차들도 서서히 길가에 멈춘다 남몰래 읽던 옛 시집의 냄새처럼 그것들 역시 초조한 기색이다 어제까지도 날은 말짱했는데 가끔은 아침마다 병든 새, 울었다 새들도 젖은 깃털을 다 털었는지 이제 아무도 제 자리엔 없구나 마치 전자오락실마다 꽈당 부딪쳐 막다른 길로 접어든 오토바이처럼 비틀비틀 몸을 추스르고 또 눈앞에 우뚝 선 타이어를 피해야지..

2021.12.16

[시] 재택근무

재택근무 산굼부리 한가득 억새풀이 일상성인 이곳 이메일 백여통이면 오프라인을 대체할 텐데 기꺼이 응할 자태인데, 욕망은 이를 압도해 얼굴을 봐야 알겠고 한눈도 팔면 안된단다 그건 네 사정이고, 네 관리방식일 뿐이고 자세, 태도라는 못된 질서가 결과를 압도해 왜? 네가 고독해서다, 네가 와로워서다 온갖 정신병자들이 우두머리를 자처했을 때 조직은 그만한 불행을 짊어진다, 네 책임이야 책임질 줄도 모르는 짐승은 거두지 않는 법 손절이닷, 농담 한마디로 세게 후려친다 안 바뀐다는 걸 알아서다, 젊은 꼰대가 더해 예술을 한다며 이곳에 내려온 그들도 있어 그들도 우리처럼일까? 작품이 중요한 거야 글로벌 스탠다드를 생각해봐, 뭘 팔아야지? 프로세스의 결과라매, 답도 프로세스에 있어 고객의 행복? 내 행복은 어딨는데 ..

2021.12.15

[시] 고독의 성, 나르샤

고독의 성, 나르샤 겨울, 한복판 천천히 달리는 열차 안 바쁜 손가락들은 저마다의 고독을 인 채 출근하는 아우성 각자 쓴 마스크 위로 멀건 눈썹만 치뜨고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자, 그게 곧 안부 결혼과 부음 뿐인 연락에 더 익숙해졌다 술집도 사라진 이른 저녁이면 또 퇴근길 지루한 빽빽함이 스마트폰 안에 가득한 온갖 화려한 이모티콘만 여백을 메운다 서울, 한복판 이윽고 환승역에 도착하면 밀물과 썰물 한 여학생, 크게 볼륨을 높였다 인생은 XX야, 오만한 목소리로 외친다 동영상 속 아저씨들은 또 하품을 했고 또 크게 춤을 춘다, 나동그라진다 모두는 무사했고 신문은 늘 시끄럽고 열차소리는 점점 멀어져 이내 곧 정적 춤추던 여학생, 그렇게 잊혀만 간다 고독의 성, 나르샤의 겨울

2021.12.15

[시] 비로 인한 감기

비로 인한 감기 택시기사 아저씨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꼭 참두꺼비를 닮아 가뭄이 난다고 김정은이 죽어야 한다며 열을 토하고 난 연신 웃음을 참다가 차창 밖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본다 언제부터인가 검은 비가 내리면 그만큼 내 우산 위로 다닥다닥 붙어왔던 죽음 그 짧은 비행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저쪽 하늘에서 가끔 들려오는 소식에 사람들 일손 놓고 또 시름하던 때에도 길마다 지키고 앉은 소녀들이 담배 물고 수줍은 엉덩이를 툭 치던 유행에 대하여 아무도 핀잔 준 적 없는 그 지루한 시간 비겁한 자위의 말들이 점점 길어지고 저마다 하나둘 감추어둔 핑계를 쫓아 시내 서점마다 초라한 단어로 치장하고 내 어깨 위에도 삼류라는 딱지가 붙는다 치욕스런 시절을 견뎌냈던 숱한 이들이 배신에 아파하고 그 고통을 입..

2021.12.15

[시] 시인 류시화씨와의 대담

시인 류시화씨와의 대담 마른 기침을 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선 여전히 축축한 냄새가 난다. 마치 장작개비처럼 그것은 서서히 젖은 복장을 해제시키고 노랗게 퍼져 올라오는 아지랑이에 취하다 문득 라디오 프로에 귀가 쏠리게 되면 전파 속에 갇힌 아지랑이의 지친 일상성과 내 몸 구석구석 퍼지는 독기어린 비애는 동시에 하나의 전구빛으로 점멸하는 객기. 인도로 히말라야로 또 얼마전엔 제주도로 맨손에 자전거를 끌고 고행을 자처한 용감함과 긴 머리칼의 고독이 우수수 떨어지던 감수성 라디오 전파음만큼이나 가볍게 날려 보내는 끈기 있는 구도심에 대하여, 아무 말도 않는다. 제 이름의 평화, 어때요, 심오하죠. 하하 다시 기침이 난다. 버스 안은 여전히 후텁지근하고 후텁지근하다 못해 비질비질 땀이 쏟아진다. 나도 저런 고행..

2021.12.11

[시] 버스 안 사람들

버스 안 사람들 추운 기침 가득한 버스에 올라서면 좌석 옆 손잡이에 기댄 노파 방탄소년단 춤을 흉내내는 소녀들이 있고 사뭇 정취가 다른 기억도 난다 길 가는 사람들 익숙하기만 한 표정에 가끔 연인들의 팔짱이 부럽기도 한데 취직도 아직 못한 대학 졸업반 내 가방 가득 기사문제집 뿐이다 뒷좌석에 요란히 탄 아줌마들이 요샌 다들 부업해요 할라치면 힘겹게 올라선 살림 무너져내릴까 공포다, 나 역시 공포다 이건 관념소설에서 다룰 주제도 아니고 시 한 구절에 실릴 안면조차 없지만 때론 그 살림이 눈물도 나 한때는 바꿔보겠다고도 했건만 어깨 가득한 졸음이 창문으로 향한 밤 컴컴한 어둠 너머 밀려오는 그리움은 미처 다하지 못한 청춘의 노래

2021.12.11

[시] 상실

상실 갯여울에 담긴 발목 아래로 한꺼풀의 삶이 또 넘어집니다. 서늘한 여름밤이면 저만치서 구슬피 울려오는 뱃고동 소리, 하나 둘 헤아리며 먼지 낀 내일의 약속들을 기억하곤 했습니다. 발이 차갑습니다. 물 위에 구르던 먼지들도 바람에 매섭게 날리는데, 한점 동요도 없이 이 물의 무덤 위에는 저렇게 밀려온 안개의 허망함만 응어리진 채로 한겨울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이미 고동 소리는 떠나버린 자국처럼 멀겋고, 간헐적인 하얀 파문... 고백을 새겨놓은 십자가처럼 아직도 말이 없는데, 가슴 속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는데. 이미 떠나간 이의 무덤은 왜 이리도 젖어 있는지. 가끔씩 비수로 떨게 만드는 이 어둠은 어디서 오는지. 두렵습니다. 차가운 물 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이곳을 떠나렵니다. 한동안 내 발목에 ..

2021.12.11

[시] 태풍의 눈

태풍의 눈 이건 만화제목이 아니야 암 아니고말고 언젠가 네가 들려준 옆 마을 살던 순이가 집을 떠났다는 그래서 많은 어른들이 찾아 헤매던 때 그 시절 그 노래 신파조도 아니지 뻑뻑한 회사 일로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던 후배들처럼 쉽게 웃음도 못 터뜨리는 말단사원처럼 눅눅해진 옷차림마다 파고든 어설픈 유혹의 그림자로 오해해서도 안되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전화로 부조를 말하지 전화로 프로포즈하는 이는 없지만 그래서 무책임하다고 항변하지만 저것 좀 봐 저렇게 물밀듯 다가오는 홍수처럼 가뭄처럼 극단적이기만 하잖아 가랑비에 옷젖기 기다리는 신세대도 늙고 복덕방마다 바둑 한 수에 걸린 늙은 목숨 찌 뿌드 한 하루의 시작처럼 메스껍기도 하고 혹은 우왕좌왕 빈 자리를 골라야 하는 전철처럼 그렇게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목..

2021.12.11

[시] 밤의 말들

밤의 말들 1 전자담배 한 갑을 사서 돌아오는 골목마다 엄마들의 초조한 표정이 딸의 귀가를 재촉하고 그 메마른 얼굴들이 엮어내는 사사로운 말들과 연신 담배를 빨며 지켜보던 풍경 속에는 발목마다 차오른 아스팔트의 냄새가 역력하고 밤기운은 무서운 속도로 어두워지기만 했다 이 도시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남아서 저마다 배반의 무게를 안고 현실이라 믿고 그토록 속아온 세월을 정 붙이며 저렇듯 힘겹게도 어린 딸들을 지켜내려는 이곳 계단을 오르면서도 그 표정들만 서성대는데 아직도 제 부모를 찾지 못한 아이도 더러 남아 퀴퀴한 어느 골목에선가 울부짖고 마주 섰던 어른들의 날카로운 금속성 외침 날이 선 말들만이 번뜩이며 지내온 시절 나도 그 시절을 좇아 이 골목을 누볐던 기억 과거의 전력이 더더욱 죄스럽기만 한 말들의 유..

2021.12.11

[시] 고독, 태풍의 눈 4

고독, 태풍의 눈 4 - 송별회 때론 사람들 눈길을 외면한 채 홀로 걸을 때가 있지, 마음의 상처는 두고두고 인화된 자국. 혼자 그윽이 꺼내보는 앨범처럼, 누군가는 그 위에 새 추억을 덧대고 누군가의 마음에선 조금씩 퇴색해 희미해질 뿐. 자국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수십년 전에도 당장 어제 그제 일들도 다 마찬가지. 그 앨범을 들추어보는 시간. 때론 호젓하게 산책길을 따라 걷기도 해, 직장상사와의 트러블도 주말의 집을 무작정 뛰쳐나온 울울함도 모두 그 수행의 길. 어차피 낯선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법은 잊었고, 바삐 혼자만의 시간을 챙기는 그때 역시 결국 잠시일 뿐이니까. 오롯이 개켜둔 슬픔도 그리움으로 또는 회한이 되고, 집에선 곧 연락이 온다. 어서 들어오라고. 느닷없이 태풍을 만나 황급히 향할 대피장..

2021.12.08

[시] 환청, 태풍의 눈 3

환청, 태풍의 눈 3 - 노동조합 마지막 폭염주의보를 알린 뉴스처럼 가을이 오는 소리, 밤마다 매미 울음이 그치고 스멀대는 귀뚜라미의 환청. 아직은 때가 아냐, 혁명을 만류하던 친구처럼 희미하기만 한 소리. 매번 늦었다. 서두르기만 해도 꿈쩍 않는 그 보수성은 마치 지난 집권세력들과도 닮아 도대체 반성이라는 걸 몰라, 또다시 한숨만 나오는 소리. 참 질기고 질긴 생명력은 오히려 추해 보여, 그가 말했었지. 마음만이 조급했어, 여유가 더 필요한 까닭이겠지. 네 평생의 한? 그러면 좀 어때, 다들 그렇게 이미 돌아가셨는데 뭘. 독립운동 때도 똑같지 않았겠어, 이게 진리야.

2021.12.08

[시] 여름의 끝, 태풍의 눈 2

여름의 끝, 태풍의 눈 2 - 휴가 무더위가 한풀 꺾인 건 순전히 입추 탓인가. 아니지, 그 뒤에 말복이 있고 태풍도 몇번은 더 지나갔어. 계절은 애당초 계기라는 게 없었지. 이른 아침부터 부리나케 출근을 준비하면서 늘 코앞인 호수공원은커녕 동네 앞 산책조차 버거우니, 자잘한 일상이 갖는 시간은 그저 초속 오미터짜리 질주 뿐. 바쁜 행렬이 뜨거운 해를 피해 전철역까지 쏜살처럼 닿으면, 무럭무럭 자라는 하루의 꿈도 이내 저물 저녁을 준비하려는 스마트폰 속에만 있었어. 그걸 깨우든 말든 크게 신경을 쓴 적 없었는데. 한사코 바빠진 뉴스들이 태풍의 끝을 알려오는 동안에는 저마다 숨가쁜 프로야구며 연예가중계며 또 밀렸던 드라마를 틀어놓고, 각자 새로이 가입한 넷플릭스의 꿈들을 싣고 떠나는 곳. 영하 삼십도의 추..

2021.12.08

[시] 폭염, 태풍의 눈 1

폭염, 태풍의 눈 1 - 출장 일곱번째 태풍이 상륙할 즈음 정부는 드디어 한일관계를 청산하자 했다 적폐청산의 구호는 비로소 현실이 되었고 저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동참하는 중 프랑스산 KTX를 타고 용산까지 향하는 길 짙푸른 녹음과 마르지 않은 강물을 건넌다 주말의 선전포고 다음에 대뜸 찾아온 건 일본의 대대적 공습이 아닌 불볕더위다 푹푹 찌는 찜통이라도 집 밖은 위험지대 본격적인 태풍이 미처 오기도 전에 세상은 태풍의 눈이 돼 말갛게 정지한다 아서라, 그러다 큰일난다 다들 만류하고 바깥 출입도 없이 캄캄한 방에 앉았다 이른 아침, KTX를 타고 용산으로 향하는 길 길가의 들풀처럼 차라리 싱그러울 수 있다면 한줄기 그늘 속 바람처럼 속이 시원했으면 무덤덤히 도심을 지켜보며 이내 서행하는 중 열차는 어..

2021.12.08

[시] 산책 2

산책 2 - 후회 얼마나 허망한 시간을 보냈느냐 얼마나 더 살뜰히 이별에 맞서려나 후회는 켜켜이 쌓여 나이테가 되고 낡아가는 음영은 점점 꼰대가 되고 곁에 자란 새싹을 돌볼 틈도 없구나 그 뻔뻔함에 속절없이 익숙해졌다 아서라, 물 한번 뿌리고 거름 주면 오랜 후회가 곧 내 키를 넘어서고 내 키는 점점 더 줄어 싹이 되려니 돌보지 않는 싹, 기억의 출발점 어김없이 자라는 겨울, 또 봄

2021.12.07

[시] 산책 1

산책 1 - 세월 때 늦은 아침, 슬리퍼를 신고 자전거를 타면 어느덧 구름도 단풍에 숨었다 가을, 향기가 사라지는 계절 물줄기의 세월이 더 흐르면 찰나의 행복, 더 초조할 텐데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하는 일 더 늦기 전에 사랑해야 할 너 아직도 기다린다는 걸 안다 겸손해져야겠다 미루고 못한 일에 대한 반성 스스로 게으름을 탓할 염치, 나이가 들수록 배워야 할 것 침묵하는 호수를 본다 잠시의 슬픔, 더 깊을 텐데 더 늦게야 꺼내놓을 얘기들 더 늦도록 울어야 하는 나 방관의 햇살, 너무 이르다

2021.12.07

[시] 직주저널 3

직주저널 3 - 동방불패도 넘다, '다주불패'*의 꿈 영화 동방불패를 본 적 있을까 사람이 하늘을 날고 말이 두동강 나던 그 화면 속 흡사 주인공이 된 것마냥 어이없게 웃던 시절. 정부가 나서서 온 무림고수들의 수법을 구사해도 결국 성룡의 취권이 극장을 평정하듯 고공행진 뿐 투기꾼이 문제다, 재건축은 안된다, 강남 필요 없다 빼곡히 적힌 공직자 명단은 또 하나같이 강남 일색 내로남불, 강남좌파는 허구, 대국민사기라는 거다 삼호어묵, 부의 인문학, 이서기, 그리고 '다주불패' 새로 생긴 말들이 더 많다 취득세부터 난리였다 양도세도 대폭 인상을 했다 종부세는 이미 하늘을 찌른다 Nevertheless, 혹독한 시련 속에서 역대 최대의 다주택자가 생겼다 욕망의 질서는 잔혹하고 치열하며 오히려 냉철한 법 투기꾼..

2021.12.05

[시] 직주저널 2

직주저널 2 - 오피스텔, '1인 가구'의 꿈 딸아이가 휴학을 신청했다 (유학이 아니라 다행이다) 경기도 방4/화2는 멀단다 인서울? 국평 한 채가 10억 아이가 오피스텔도 좋단다 기숙사는 이미 지방 애들 몫 죄 없는 딸만 꼬박 왕복 네 시간 젊어 고생 사서도 할, 못된 핑계 괜스레 미안해진다, 앱을 켠다 - 가족도 제각기 출장중인 삶, 주말가족을 더 꿈꾸는 방1/화1, 최소한의 조건 인서울 삼십만원 기준은 뭘까? 궁금해진다, 보증금 없는 월세는 불가능인데 야반도주 탓이란다 아빠, 요즘 대세는 투룸이야 또 보챈다 분양가가 얼마짜린데? 8억이래, 미쳤다 인터넷으로 찾은 삼십만원 원룸 눈앞에 툭 놓는다, 대뜸 싫단다 돈이 없는데, 어떡해? 나 알바할래, 그래서 휴학이다 집 문제도 휴학 사유가 되는 애당초 돈..

2021.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