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저녁상 앞에서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1. 12. 16. 15:15

 

 

 

저녁상 앞에서 

 

 

  

김명인 시집을 읽다 

죄 노른자 투성이인 시들 속에  

내가 찾던 비애는 함께 삶아져 

저리도 노릇노릇하게 변색한다  

먹다 남은 빵이라도 구워낸 걸까 

아니면 혹 밤새 내리던 비처럼 

축축이 젖었기만 한 냄새였나  

친구들 오간 흔적, 우유갑만 남아 

사흘째 방안을 내내 뒹군다  

한때나마 시를 쓰려고 했었지 

그런 식으로 파묻혀보고도 싶었어 

비에 젖은 창문, 긴 골목이 흐르고 

자동차들도 서서히 길가에 멈춘다 

남몰래 읽던 옛 시집의 냄새처럼 

그것들 역시 초조한 기색이다 

어제까지도 날은 말짱했는데 

가끔은 아침마다 병든 새, 울었다 

새들도 젖은 깃털을 다 털었는지 

이제 아무도 제 자리엔 없구나 

마치 전자오락실마다 꽈당 부딪쳐 

막다른 길로 접어든 오토바이처럼 

비틀비틀 몸을 추스르고 또 

눈앞에 우뚝 선 타이어를 피해야지 

늘 그런데 왜 가끔은 지쳐야 하는지

또 그렇게 하품을 하며 일어섰었나 

물 끓는 소리가 곧 멈추었고 이제 

밥 짓는 냄새가 방 안으로 스민다 

향기로운 일상의 마취, 때문에 

달걀부침은 끝내 먹지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