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 44

김용택, '비' ("그대, 거침없는 사랑", 푸른숲 1993)

비 새벽비 소리에 홀로 깨었습니다 창호지 문이 환하게 밝아져 오는 오랜 시간 그 빛이 좋습니다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기 시작합니다 봄비는 사방에 떨어지며 그리운 당신 모습을 다 그려내고 온갖 소리들은 온갖 생각을 다 만들어냅니다 온갖 소리 중에서 당신의 모습을 쫓아 뒤척이는데 당신 생각은 끝도 갓도 없이 넓고 깊어져서 당신 생각으로 환히 날이 샙니다 * 김용택, "그대, 거침없는 사랑" (푸른숲, 1993) - :: 메모 :: 밤잠을 뒤척이다 이른 새벽에 잠을 깬 적이 많았습니다 불면의 밤이 사라진 여름의 저녁,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이제 곧 장마가 오려는가 봅니다... 장마를 기다립니다

문학앨범/필사 2024.06.28

안현미,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안현미 1972년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서울산업대를 졸업했다. 2001년 문학동네신인상에 '곰곰'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불편'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시집으로 "곰곰"이 있다. - 식객 미술관 앞에서 애인처럼 만났다 빨간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수영장과 목욕탕을 지나 라일락 꽃나무 아래서 마늘빵을 나눠먹었다 책방에 들러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란 제목의 똑같은 책을 사서 나눠가졌다 커플링처럼 나눠가진 책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목으로 봄비가 왔다 음악이 왔다 고독도 왔다 같은 제목의 책을 나눠지녔듯 같은 착각을 나눠가졌다 그사이 애인들이 왔다 아랍탁자와 아랍탁자 사이, 시간은 봄비와 음악과 고독을 연주하고 애인들은 달콤했다 네팔 고산에서 야생하는 야크 젖으로 만든 치즈..

문학앨범/필사 2024.06.28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소네트" (민음, 2018)

57 내 그대의 노예가 되었나니 그대가 요구하는 시간에 시중드는 것밖에 무엇을 하리요? 나에게는 소비할 귀중한 시간도 없고 할 일도 없어라, 그대가 명하시기 전에는 나의 군주여, 내가 그대 위하여 시계를 들여다보는 동안 끝없는 시간을 감히 나무라지도 못하고, 한 번 그대가 하인에게 작별을 고하면 서로 보지 못하는 고통을 괴롭게도 안 여기노라. 그대가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시나 질투하는 마음으로 묻지도 않노라. 슬픈 노예인 양 무심히 앉아 있으리, 그대 가는 곳마다 사람들 기쁘게 하시리라 생각하며. 사랑은 임에게 복종하는 충실한 바보라, 무엇을 하시든 나쁘게 생각지 않아라. - 89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문학앨범/필사 2024.06.28

송기원, '무게' ("저녁", 실천문학 2010)

무게 바람이 불면, 문득 무게가 그리워지네 나도 한때는 확실한 무게를 지니고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한껏 부푼 부피도 느끼며 군청색 셔츠를 펄럭였지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 누군가의 안에서 언제까지라도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 송기원, "저녁" (실천문학, 2010) - :: 메모 :: 다시 송기원을 찾기 시작한다 서른 해쯤 전의 일이다 바람이 불면 무게가 그리워지고, 다시 평온해진다면 가벼울 수도 있게 될까... 잘 모르겠다 https://rnmountain.tistory.com/m/13765265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 / 감각의 총화- 송기원 시인의 회복기의 노래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 / 감각의 총화- 송기원 시인의 회복기의 노래 현대시는..

문학앨범/필사 2024.06.27

박준, '관계'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관계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유독 힘들어하는 문제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 생활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문제도 물론이겠지만 애정과 연애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아리다. 내가 상대를 애정하는 마음보다 상대가 나를 애정하는 마음이 작을 때 우리는 짝사랑이라는 병에 든다. 이 병은 열병이다. 발병부터 완치까지 나의 의지만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다만 짝사랑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가져본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 이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그리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짝사랑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상대를 애정하는 마음보다 상대가 나를 애정하는 마음이 더 클 때 생긴다. 이럴 때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대는 더없..

문학앨범/필사 2024.06.27

오규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사랑의 기교", 민음 1978)

비가 와도 젖은 者는 - 巡禮 1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 오규원, 사랑의 기교 (민음, 1978) - ..

문학앨범/필사 2024.06.27

박준, '용산 가는 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용산 가는 길    - 청파동 1       청파동에서 그대는 햇빛만 못하다 나는 매일 병(病)을 얻었지만 이마가 더럽혀질 만큼 깊지는 않았다 신열도 오래되면 적막이 되었다 빛은 적막으로 드나들고 바람도 먼지도 나도 그 길을 따라 걸어나왔다 청파동에서 한 마장 정도 가면 불에 타 죽은 친구가 살던 집이 나오고 선지를 잘하는 식당이 있고 어린 아가씨가 약을 지어준다는 약방도 하나 있다 그러면 나는 친구를 죽인 사람을 찾아가 패(悖)를 좀 부리다 오고 싶기도 하고 잔술을 마실까 하는 마음도 들고 어린 아가씨의 흰 손에 맥이나 한번 잡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

문학앨범/필사 2024.06.26

전윤호, '수몰 지구'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 2019)

수몰 지구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 전윤호, 세상의 모든 연애 (파란, 2019) :: 메모 :: 연애시의 '정석'이라고 칭찬을 받는 한 시인의 시편에서 그 애절함만큼의 그 비통함만큼의 정서를 잘 읽어낼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스토리..

문학앨범/필사 2024.06.24

진은영,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지 2022)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지, 2022) :: 메모 :: 슬픔이라는 정서, 아주 잘 표현한 수작 한 편.

문학앨범/필사 2024.06.22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When October Goes, 시월 하순의 시작)

[하루한편] When October Goes, 시월 하순의 시작 (이제니, 남겨진 것 이후에) : 남겨진 것 이후에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

문학앨범/필사 2023.10.16

진은영, ‘몽유의 방문객’ (가을에 지는 꽃, 수국에 얽힌 추억)

[하루한편] 가을에 지는 꽃, 수국에 얽힌 추억 (진은영, 몽유의 방문객) : 몽유의 방문객 너는 오겠지, 달의 해안에 꽃들이 하얗게 밀려오는 봄밤에 너는 오겠지, 부서진 간판의 흐느낌을 가로수 검은 가지로 건드리는 여름밤에 오겠지, 추위와 얼음의 투명한 발톱으로 다듬어진 소박한 식탁에 부엌에서 다시 칼국수를 끓이려고 하얀 밀가루가 여주인의 손톱 사이에 실낱 같은 달로 떠오르는 밤에 초록색처럼 사랑스런 연인이었네, 아닌가 첫 눈송이의 흰빛으로 너는 사랑스러웠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가을밤의 어두워가는 남청색 코트 자락에 기어들어가 별빛처럼 부드러운 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었으므로 꿈속을 걸으면서 너는 기억하네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식탁* 부드럽고 위태로운 장소의 이름 속으로 너는..

문학앨범/필사 2023.10.15

서윤후,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괴도 저 고개 숙인 자의 표정을 알고 싶다 코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떤 찡그림을 발명했는지 그 찡그림을 펼치지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마른 헝겊으로 안경을 닦을 때 초조하게 뒤돌아볼 때 앞은 잠시 앗아갈 것이 많아지는 세계 새장은 모란앵무를 찾으러 떠났다* 흔들의자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림자만 남겨지는 실내악 예열된 오븐 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볼 때 밤새 얼마나 번성하게 될 것인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거나 이젠 얼마 없는 이야기 고개를 들면 모자라게 된다 뜨개질처럼 멀고 먼 생활의 과로사를 시작하게 된다 어딘가 다친 모과들을 닮아 향기를 먼저 내밀게 된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고개 숙인 자가 거느리는 밤 속에서 감긴 눈을 일으킬 슬픔이 필요하므로..

문학앨범/필사 2023.07.05

외성(外城) (박형준)

외성(外城) 박형준 나는 닻에 묶여 있는 배를 바라본다. 폭풍이 지나간 하늘에도 구름이 닻처럼 떠 있다. 먼바다로 나아가 밤의 가장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다는 것. 배도 하늘도 하루쯤은 고요하게 쉬어야 한다. 벌써 저녁이 온다. 빛이 어둠 속에서 태어나고 있다. 저녁 바다에 떠 있는 빛들,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나비떼 같다. 어서 오라고, 어서 전구마다 불을 가득 켜고 먼바다로 나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어부들의 지친 삶 속에서도 벌써 힘줄이 나비떼처럼 불끈불끈 일어선다. 어두운 바다 위를 미끄러지는 빛들. 저녁이 오면 하늘의 닻인 구름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장 맑은 별들이 떠오른다.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별들을 지도 삼아 나비보다 영롱한 빛들을 낚는다. 밤에 홀로 눈 뜨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라고..

문학앨범/필사 2023.05.11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할아버지께서 노래를 찾아오라고 하셨다 어떤 노래를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거라고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이윽고 문지기를 만났다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신발을 벗어주면 문을 열어주지 나는 문지기에게 신발을 벗어주었다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윽고 양 치는 목동을 만났다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너의 그 근사한 외투를 벗어주면 양의 노래를 들려주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목동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외투를 벗겨 달아났다 오들오들 떨며 달의 분화구를 향해 갔다 거기서 잠시 추위를 달랠 요량이었다 그곳엔 행색이 초라한 사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아저씨, 일어나보세요 저는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얘야, 나도 노래를 찾..

문학앨범/필사 2023.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