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습작

촌음의 경계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4. 4. 2. 10:18

   
   
   
   촌음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돌고 돈다 
   인간관계의 고민은 서로가 서로 사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날들로 인해 생긴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밤에 
   맨발바닥에 모래가 서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땅이 아주 가깝게 발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느낀다 
 
   - 박형준, 「밤의 소리」 중에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문학동네, 2023) 
   
    

            
   촌음의 경계를 마다한 채 우리는 관계라는 낱말의 그림자를 찾아 문밖을 서성댑니다
   가파른 달빛이 그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안 벚꽃이 하나둘 피었다 지고 봄이 금세 저물어감을 알아챕니다
   이른 겨울밤마다 온통 기다려온 봄임에도 벌써 이렇듯 저문다는 일에 항상 익숙해져만 갑니다    
   고민하지 않기 위한 방편을 세월만큼 배워온 까닭입니다 그만큼 늙어간 탓입니다 
   설렘도 없이 그리움도 없이 무덤덤함만으로 계절을 비껴가는 동안 계절은 무수히 지나쳤을 뿐이고 
   스치는 순간 순간마다 고른 호흡을 가다듬고 늙어옴을 자랑스러워할만한 시대였나 봅니다 
   촌음의 경계를 마다한 채 우리는 관계라는 낱말의 지속성을 때때금 생각하곤 합니다 
   가파른 이별이 그 매듭을 짓는 동안 목련이 다시 하나둘씩 피었다 질 테며 봄은 아직 저물지도 않았습니다 
   기다림에 익숙해진다는 말처럼 오지도 않을 봄을 기다리는 일처럼 익숙한 일도 드물게 되었습니다 
   넉넉해지기 위한 방편을 세월만큼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만큼 지헤로웠을 뿐입니다 
   설렘도 없이 애태움도 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동안에도 계절은 무심히 우리 곁을 스칠 뿐이고 
   스치는 순간 순간마다 고른 호흡처럼 낙관주의자가 되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