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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노인과 꽃'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노인과 꽃 노인이 꽃나무를 심으심은 무슨 보람을 위하심이오니까. 등이 곱으시고 숨이 차신데도 그래도 꽃을 가꾸시는 양을 뵈오니, 손수 공들이신 가지에 붉고 빛나는 꽃이 맺으리라고 생각하오니, 희고 희신 나룻이나 주름살이 도리어 꽃답도소이다. 나이 이순을 넘어 오히려 여색을 기르는 이도 있거니 실로 누하기* 그지없는 일이옵니다. 빛깔에 취할 수 있음은 빛이 어느 빛일는지 청춘에 맡길 것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쇠년*에 오로지 꽃을 사랑하심을 뵈오니 거룩하시게도 정정하시옵니다. 봄비를 맞으시며 심으신 것이 언제 바람과 햇빛이 더워 오면 고운 꽃봉오리가 촉불 켜듯 할 것을 보실 것이매 그만치 노래*의 한 계절이 헛되이 지나지 않은 것이옵니다. 노인의 고담*한 그늘에 어린 자손이 희희하며* 꽃이 피고 나무와 벌이 날..

문학앨범/필사 2024.07.08

정지용, '백록담'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백록담      1    절정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 키가 점점 소모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굴만 갸웃 내다본다. 화문*처럼 판 박힌다. 바람이 착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처럼 난만하다*. 산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2    암고란* 환약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아 일어섰다.     3    백화* 옆에서 백화가 촉루*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승없지* 않다.     4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

문학앨범/필사 2024.07.08

정지용, '향수'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취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

문학앨범/필사 2024.07.08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창비 1996)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김수영, "로빈슨 크루소..

문학앨범/필사 2024.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