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18] '신뢰'를 형성한다는 일 :
알랭 드 보통의 책 <관계>에 나온 말들 중 "신뢰는 타인의 부재에 대한 합리적 해석"이란 말을 두어 달쯤 전부터 줄곧 생각해온 편입니다. - 이 말에서의 '부재'는 일종의 '미지'인 상태를 뜻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는 결국 스스로의 몫인 셈입니다.
대개의 경우는 강박관념, 불안감, 맹목적 믿음, 무지와 어리석음 등을 경계해야 하나 거꾸로 그것들이 종종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기계공학 출신의 사람들은 항상 '톨러런스'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치밀한 성격들을 갖고, 반대로 화학공학 출신인 경우는 '믹싱'에 대한 강박으로 사교적인 편이죠. 산업공학 전공자들의 경우는 '최적화'에 대한 강박이 항상 '최선'에 대한 회의로 존재해온 편이기도 합니다.) 이런 류의 강박관념들이 전공병, 직업병, 이유 모를 불신, 트라우마 등을 낳기도 하겠죠...
미학에 있어서의 최고봉 격인 '비장미'는 상당 부분 매력적인 주인공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운명들을 자주 그려내기도 합니다. 때때로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작가들의 운명 또한 일부러라도 '불행' 쪽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도 꽤 많았던 시절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홍상수의 영화제목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들은 자주 타인에 대한 기대섞인 낙관, 뿌리깊은 불신과도 같은 감정들을 내비치곤 하는데 실상은 대개가 '선입견'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매사에 주의 깊고 배려심을 갖고 지켜볼 줄 아는, 잘 모르는 부분은 꼭 문답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 등이 필요한 까닭이겠죠... 이것들을 일컫고자 저는 '관심'과 '애정'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합니다. 잘 못한다는 뜻입니다. ㅎㅎ
- 어제와 오늘 제게 들었던 생각들입니다.
이번 주말을 고비로 해 빠르신 분들은 이미 탈고를 해 응모작들을 제출하게 될 테고, 가장 늦는 경우도 다음 주말을 넘기진 않을 것 같습니다. (더 늦게 되는 경우는 아예 내년초에 있을 현대문학 신인추천과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노리는 게 더 타당한 순서가 아닐까 하고요. 퇴고의 기간은 대략 습작의 기간보다도 수십 배에 달한다는 걸 감안해서요.) 모쪼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계속 응원하고 있습니다.
심사위원들한테서 그 '신뢰'를 얻어내려면? 음... 제일 먼저 떠오를만한 덕목은 다섯 편의 시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그 어떤 '일관성'을 즉, 작가 스스로를 우선 드러내야 할 것 같군요. 그건 정서의 측면, 작법의 측면, 사상의 측면 또는 분위기나 주제의식 등을 통해서도 가능할 텐데... 너무 '매력적'인 부분에만 매몰돼 그걸 놓치게 되면 일명 "화장이 아닌 변장" 취급을 당하기 일쑤이기 마련이라서요. (결국 신춘문예는 단 한 편의 '시'보다는 단 한 명의 '시인'을 뽑는 자리라고 보시는 게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사실 크게 좋아하진 않지만 그대로 선두그룹의 일원임이 분명한 황인찬 시인의 시 한 편을 꺼내고자 합니다. 박준의 그것들이 마치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닮은 다채로움 속의 은은함에 있다면, 황인찬의 그것 또한 충분히 석굴암의 대범천과 제석천을 닮아 정교하고도 견고한 무게감이라는 미덕을 갖습니다. 오늘은 그것들과는 좀 다른 취향으로 한 편 고르겠습니다. ^^
P.S.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일, 그런 노력에 부합할만한 예술적 성취가 시 말고도 또 무엇이 있었겠나를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박효신의 노래 <야생화>가 떠올랐습니다. 노래는 상당히 무겁기만 한 편이며,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질만큼의 상처투성이일 뿐이겠지만...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차분히 시작해보는 일요일 아침 되시기 바랍니다. ;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
이제 너는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은유를 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싸늘한 겨울 주머니에 담뱃갑이 든 코트를 부여잡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혼자서 공원을 횡단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겨울나무가 얼마나 무심한 물건인지 추궁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무심코 도달한 거리에서 경탄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순진함을 진성성과 구분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어둑한 이 겨울에 집을 떠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손이 얼어가는 것을 무감하게 대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멀리 나는 새들의 이름을 외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저기 굴러다니는 작은 사물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컴컴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친근히 여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어째서 이곳에 빛이 들지 않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겨울과 세계에 혼자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슬픔이 인생의 친척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눈 덮인 도로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따뜻한 불 가에 앉아 혼령이 부유하는 것을 알아채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한강의 겨울 오리들을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옛 연인의 얼굴을 망각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이 겨울의 길이 지독하게 고독하다는 사실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그믐 아래 야습을 도모하는 미지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내일의 불가능을 믿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여전히 너의 집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네가 서 있는 곳이 아직도 겨울밤의 공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거기까지만 쓰고 다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너의 겨울 은유를 신용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밉다" 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https://youtu.be/D1A7wLNSPhI?si=AlEJZvPZ8P_Ddq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