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8.
(중앙일간지 리뷰, 1/8) 경향신문 신춘문예 :
이제 신춘문예도 불과 8일밖에 응모기간이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8일은 각 중앙일간지별로 주요 이력 및 시사점 등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해 공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일명 '총정리' 기간에 해당될까요?) 해당 신문사들은 가나다 순으로 해서 경향, 동아, 문화, 서울, 세계, 조선, 한국, 한국경제 등이며 특히 경제지임에도 당대의 최고 가객 중 한 명인 진은영 시인이 심사를 맡은 한국경제까지를 포함하여 총 여덟 군데입니다. 습작량이 많은 분들이라면 총 40~50편 정도로 각 신문사를 모두 다 도전해볼 수도 있겠네요... 그 첫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경향신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경향신문의 최근 5년간 신춘문예 당선작 및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요약입니다. ;
2019년 : 성다영, 너무 작은 숫자 (심사 - 장석남, 김민정, 신용목)
"우리는 모두가 잘 쓰고자 한다. 하지만 ‘쓰려는 것을 잘 쓰는 것’과 ‘잘 쓰기 위해 쓰는 것’은 다르다. 시가 고유한 세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언어의 장르이면서 또한 진실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성다영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2020년 : 박지일, 세잔과 용석 (심사 - 김행숙, 신용목, 김현)
"박지일님의 응모작들은 무엇보다 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자신만의 고유한 호흡을 유지한 채 여간해선 서두르지 않았다. 따뜻하고 유려하다가도 일순간 차가워질 줄 알았다. 사유가 과장 없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2021년 : 윤혜지, 노이즈 캔슬링 (심사 - 김행숙, 신용목, 김현)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든 것은 그 말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실어나르는 목소리였다. 숨기지도,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으며 이어짐과 멈춤의 무심한 굴절을 만들어내는 매혹 앞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구식(舊式) 동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면 어떨까. 가능하면 오래, 그리고 더 가까이서 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2022년 : 백가경,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심사 - 박준, 김행숙, 김현)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2023년 : 박선민, 버터 (심사 - 김행숙, 이경수, 송경동, 황인숙)
"버터에서 출발해 종횡무진 경계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의 바탕에는 버터가 탄소발자국이 많은 음식이라는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시적 상상력으로 풀어낼 줄 아는 감각이 돋보였다. 다섯 편의 시가 고른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점도 믿음이 갔다. 말을 예민하게 다룰 줄 알고 상상력의 전개가 독창적이면서도 이 시대의 가장 첨단의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는 시를 발견할 수 있어서 기뻤다."
신용목, 김현 그리고 박준, 송경동 시인 등도 함께 등장해왔지만 아무래도 가장 오랫동안 심사를 맡은 김행숙 시인의 영향도 아예 없지는 않았겠죠? 경향신문에서 가장 최근에 발표된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들의 면면이 갖는 뚜렷한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시적 경향에서는 눈에 띌 법한 특징들 몇몇은 갖는다고도 볼 수가 있겠죠. (아마도 이들은 올해 신춘문예에서도 주요 화두들이 될 것 같고요.)
- 산문시들이 워낙 강세인지 운율은 이제 거의 실종
- 알레고리 등을 도입한 환상문학류의 광범위한 대두
- 창작전문학원 중심의, 세부적인 면까지의 보편화 (문체의 특성상 이들은 기성시인들이 개설한 유료과정 중심)
- '시대'보다는 '일상'에 더더욱 천착한 '은둔형' 고백 등등이 아닐까 합니다.
음... 이들을 문학사적으로는 또 어떻게 정리해 담을 것인가도 현 문단의 가장 큰 숙제 중 하나가 되리라 봅니다. (어쩌면 “별다른 성취가 없었다”고 쓸 수도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
버터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
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
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울의 일종일까요?
버터는 뜨거운 프라이팬의 바닥에서 녹습니다
녹기 전에는 잠시
사각의 모양이었습니다
다방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만
책상과 주로 이별에 쓰이는 인사를 닮기도 했습니다
안녕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안녕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한평생 뒤집어도 맞는 짝을 연속해 찾기란 어렵습니다
자신과 다른 모양을 가진 인사에
분명 트집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부서졌군, 다른 말로 교체해달라는 뜻입니다
삐뚤어졌군, 새 말로 달라는 뜻이고요
밀항선을 타고
전 세계로 스며들었습니다
버터 한 덩어리에는 항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파된 배에서 떨어져 부유하다가 유빙처럼 발견된 버터도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유빙이 가로지른 국경선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시간에 걸쳐
버터가 녹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버터가 사각인 이유는
창문에 넣고 굳혔기 때문입니다
악천후를 뚫고 달리는 창문은
격렬한 속도입니다
* 202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