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문창과도 신춘문예도 아닌, 작가들의 '졸업장'은?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
파일명 서정시*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조각
한쪽 귀퉁이가 해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 가방과 몇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 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병
숲에서 주워온 나뭇잎 몇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받았는지
강의 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 Deckname <Lyrik>.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
*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창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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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인사가 좀 늦었습니다.
몇 통의 메일들에 대한 회신을 부쳤고, 이른 아침의 공기를 맡았습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올해 신춘문예의 화두 중 하나로 '신서정'의 문제가 있겠습니다. 결국 작품의 성취로 판가름이 나게 될 이 현대시의 면모를 놓고 기성시인들도 각자의 신념을 응모작들에 투영시켜 내놓으리라 예상합니다만, 어쩌면 이제 사뭇 달라진 시단의 풍경 전체를 빗댄 말로도 통용될까에 대한 관객의 표정들도 꽤 유동적이기만 합니다. (저 또한 제 나름대로의 정의와 해석을 놓고 확신이 들지 않아 스스로를 시함대에 올려놓을 뿐입니다.)
벌써 또 화요일입니다. 앞으로 나흘 뒤면 모든 신춘문예 일정이 마감되겠죠... 올 한해를 빛낸 습작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이달의 희비를 담담하게 지켜보는 편이 더 유익하리라 미리 말씀드립니다. 통상 다음주 주말을 전후로 해 당선자한텐 통보가 있을 테며, 부대행장들과 당선소감 준비 등을 거쳐 새해 첫 신문에도 오를 예정이겠으니 응모하셨던 분들께서는 미리 짐작하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첫 응모였던 재작년에 비슷한 경험을 가져본 바 있어 굳이 말씀드려요.)
올해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김기택 시인 직전의 수상자였던 나희덕 시인은 대산문학상 외에도 김수영 문학상,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모두 수상한 바 있습니다. (오늘의 시는 백석문학상 수상시집의 표제작이고요.)
등단을 하게 된다면? 곧장 출간과 문학상에의 도전자로서 그 첫걸음을 새롭게 내디뎌야 할 시점이 됩니다. 끝이 아닌 '시작'인 셈이겠죠.
작가들의 영예라 함은 수백대 1의 경쟁인 문창과 입시도 아니고, 1~2천대 1의 경쟁인 신춘문예 등단도 아니라, 자기만의 책을 펴내고 또 그것으로 대략 3천대 1의 경쟁을 뚫고 문학상을 수상하는 데까지 이르는 '구도의 길'이지 않을까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건필을 당부드리는 연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