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내 그대의 노예가 되었나니 그대가 요구하는 시간에
시중드는 것밖에 무엇을 하리요?
나에게는 소비할 귀중한 시간도 없고
할 일도 없어라, 그대가 명하시기 전에는
나의 군주여, 내가 그대 위하여 시계를 들여다보는 동안
끝없는 시간을 감히 나무라지도 못하고,
한 번 그대가 하인에게 작별을 고하면
서로 보지 못하는 고통을 괴롭게도 안 여기노라.
그대가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시나
질투하는 마음으로 묻지도 않노라.
슬픈 노예인 양 무심히 앉아 있으리,
그대 가는 곳마다 사람들 기쁘게 하시리라 생각하며.
사랑은 임에게 복종하는 충실한 바보라,
무엇을 하시든 나쁘게 생각지 않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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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어떤 허물 때문에 나를 버린다고 하시면,
나는 그 허물을 더 과장하여 말하리라.
나를 절름발이라고 하시면, 나는 곧 다리를 절으리라.
그대의 말씀에 구태여 변명 아니 하며.
애인이여, 사랑을 바꾸고 싶어 구실을 만드시는 것은
내가 날 욕되게 아니하는 것보다 절반도 날 욕되게 아니하도다.
그대의 뜻이라면 아직까지의 친교를 말살하고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리라.
그대 가는 곳에는 아니 가리라.
내 입에 그대의 이름을 담지 않으리라.
불경한 내가 혹시 구면이라 알은체하여
그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대를 위하여서는 나를 대적하여 싸우리라,
그대가 미워하는 사람을 내 사랑할 수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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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그대의 사랑과 연민은
속된 추문이 내 이마에 찍은 낙인을 없애 주도다.
나를 시(是)라 비(非)라 부르는 사람 무엇 때문에 상관하리오?
그대가 내 악을 푸른 그늘로 덮어 주고 내 선을 인증해 주나니
그대는 나의 온 세상이라, 나는 다만 그대 입으로부터
나의 수치와 명예를 알려 애쓰노라.
내게는 다른 아무도 없고 또 누구 위해서도 나는 살지 않으므로
나의 강철 같은 마음을 선으로 또는 악으로 바꿀 수 없노라.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한 관심을
깊은 연못에 던져
나의 독사 같은 마음은 비평도 아부도 듣지 않노라.
그대여 유념하라, 어찌도 무관심한지.
그대는 그리도 강하게 내 마음속에 뿌리박았나니
그 밖의 온 세상은 죽은 것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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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음욕을 행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낭비에 의한 정신의 소모라
행하기 전까지도 음욕은
위증이요, 실인이요, 잔인이요, 오욕이라,
야만이요, 과격이요, 조야요, 잔학이요, 불신이라.
향락이 끝나면 곧 경멸이요
이성을 지나쳐 추구하고 그것을 얻자마자
이성을 지나쳐 미워하도다,
마치 삼킨 자에게 고통 주려고 고의로 놓은 미끼를 미워하듯.
추구하는 동안도 광증이며, 얻은 뒤도 광증이라.
행한 뒤에도, 행하고 있는 것도, 행하려는 그것도 다 극단이라.
경험 중에는 축복이요, 경험 뒤에는 비애라.
그전에는 환희요, 그 후에는 악몽이라.
이 모든 것을 세상은 알지만 잘 아는 이 없어라,
지옥으로 사람을 이끄는 그 천국*을 피할 줄은.
*육체의 환락경(歡樂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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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언젠가 작은 사랑의 신이 잠자고 있었노라,
가슴에 불붙이는 횃불을 옆에 놓고.
그때에 순결을 맹세한 여러 선녀가
총총걸음으로 걸어왔어라.
그중에 가장 아름다운 처녀가 그 횃불을 잡았노라,
수많은 참된 가슴을 태운 그 불을.
이리하여 정열의 사령관은 잠을 자다가
한 처녀의 손에 무장해제를 당하였도다.
그 횃불을 그녀는 근처에 있는 찬 샘에 꺼 버렸노라,
그 샘은 사랑의 횃불에서 열을 얻어
온천이 되고 양약(良藥)이 되도다.
그러나 연인의 노예인 나는
치료하러 갔다가 시험해 본 후 깨달았노라.
사랑의 불은 물을 덥게 하나, 물은 사랑을 식히지 못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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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소네트" (피천득 옮김, 민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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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시큰둥하게 읽고 있는 시간... 만취한 이의 읊조리는 듯한 말투,
이걸 '낭만'이라고 읽는 이들, 꽤 있더라? (박정대를 모르는 듯?)
왜 다리를 절지 않느냐며 따져 묻던 이도 있다
사랑을 글로만 배운 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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