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안현미,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단테, 정독 2024. 6. 28. 17:34

 
 
 
   안현미 
 
   1972년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서울산업대를 졸업했다. 
   2001년 문학동네신인상에 '곰곰'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불편'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시집으로 "곰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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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객 
 
 
   미술관 앞에서 애인처럼 만났다 빨간 공중전화박스 앞에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수영장과 목욕탕을 지나 라일락 꽃나무 아래서 마늘빵을 나눠먹었다 책방에 들러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란 제목의 똑같은 책을 사서 나눠가졌다 커플링처럼 나눠가진 책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목으로 봄비가 왔다 음악이 왔다 고독도 왔다 같은 제목의 책을 나눠지녔듯 같은 착각을 나눠가졌다 그사이 애인들이 왔다 아랍탁자와 아랍탁자 사이, 시간은 봄비와 음악과 고독을 연주하고 애인들은 달콤했다 네팔 고산에서 야생하는 야크 젖으로 만든 치즈를 불에 구워 얇게 썬 사과와 함께 먹는 맛처럼 같은 착각을 마지막까지 나눠갖고 손을 흔들었다 시구문 밖으로 들어서자 시간은 할증으로 포맷되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봄은 춘궁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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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들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하여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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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 꿇은 나무 
 
 
   한 사내가 절벽 밖으로 걸어갔다 
 
   한 여자가 그 사내를 따라갔다 
 
   시간 밖에서 시간을 읽던 때였다 
 
   수목한계선 무릎 꿇은 나무 
 
   오랜 여행을 하며 여러 국경을 넘어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 바람 
 
   한계 위에 섯 한계 너머를 바라본다 
 
   육탈을 한다 
 
   제 갈 길을 가라 누가 뭐라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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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현미, "이별의 재구성"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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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모 :: 
 
   오랜만에 안현미 시집을 다시 꺼낸다 
   '이별'이라는 단어는 사실 '만남'이라는 단어와 짝꿍 신세라서, 
   굳이 그 헛헛함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인데... 
   대개의 경우는 시간만이 허락할 그 반대편의 사연들을 
   (즉 '만남'을) 가능성 '제로'로 놓는 경우가 곧 '절망'이 되는 법 
   
   '희망'과 '절망'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가 아닐까 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