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어떤 슬픔은 새벽에 출항하고 어떤 아픔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오늘 우리는 겨우 살아 있다. 어쩌면 저주가 가장 쉬운 용서인지도 모르겠다.
2014년 장미가 피는 계절 연희에서
안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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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1
일몰 후 아홉번째 달이 떴고
그는 동쪽 식탁 위에 왜가리처럼 놓인 촛대에 불을 붙였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그는 침묵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침묵은 골동품처럼 지혜로웠다
2
그때 폭설 속에 묻어둔 술병을 꺼내러 갔던 여자가 돌아왔고
그 여자가 데리고 온 낯선 공기는 순식간에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갔다
3
인생이란 원래 뭘 좀 몰라야 살맛 나는 법
4
아홉번째 핫산이 돌아왔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그는 인생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가 사용하는 인생은 침묵처럼 두꺼웠다
5
다시 아홉번째 달이 뜨고
다시 시간은 골동품처럼 놓여 있고
다시 이야기는 반복된다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으로
원래 인생이란 뭘 좀 몰라야 살맛 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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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봄이고 밤이다
목련이 피어오르는 봄밤이다
노천까페 가로등처럼
덧니를 지닌 처녀들처럼
노랑 껌의 민트향처럼
모든 게 가짜 같은
도둑도 고양이도 빨간 장화도
오늘은 모두 봄이다
오늘은 모두 밤이다
봄이고 밤이다
마음이 비상착륙하는 봄밤이다
활주로의 빨간 등처럼
콧수염을 기른 사내들처럼
눈깔사탕의 불투명처럼
모든 게 진짜 같은
연두도 분홍도 현기증도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오늘은 모두 비상이다
사랑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해 봄밤 미친 여자가 뛰어와 내 그림자를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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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현미,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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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안현미 시집을 여럿 다시 보던 중에 문득
그녀가 시를 쓴다면 누굴 닮겠는가가 궁금했다
김언희만 아니라면 다 좋다
최승자도 박참새도 김혜순도 어차피 화해의 대상일 뿐이니...
선입견을 벗는다는 게 참으로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