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어느 여름 저녁
파초 잎 아래에서 당신이 울고 있다면
어느 여름 저녁
내 얼굴이 못생겼다면
그건 슬픔이 얼굴을 깔고 앉았기 때문.
2024년 4월
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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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아침
진눈깨비는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나를 꽉 쥐고 흩날리는지
눈이 뽑히도록 보고 싶은 것
눈이 뽑히도록 보고 싶은 것
그리워 죽죽 우는 것
진눈깨비여
진눈깨비여
나를 부수어 가지세요
나를 부수어 흩뿌리세요
나는 왜 언제나 나쁜 것만 예언할까요?
진눈깨비는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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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말
뜨거운 것을 쓰다 쏟았습니다 미안해요 부치진 못할 것 같군요 미지근한 건 문학이 아니야, 말하는 어른 여자를 만난 저녁 쭈꾸미를 먹었습니다 뛰지 않는 심장과 뛰려는 심장 사이에 사랑을 접어놓고
마음이란 뭘까요 호호 불어 먹고 싶은 마음이란 어디에 간직해야 하는 걸까요
당신은 오늘 내 손을 꼭 잡고 귓속에 뜨거운 말을 부어주었습니다
그것을 안고 멀리 갈 거예요
당신이 나를 처음 본 날,
쉬운 퀴즈를 풀듯 나를 맞혀버렸다는 걸 기억할 거예요
당신이 좋아서
다가가고 싶지가 않아요
겨울 숲에
봄 아닌, 다른 계절이 오면
그때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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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에 울었다
홀로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는 밤
병원은 멀다
14일이라서
수요일이라서
알 수 없는 수의 날들이라서
이마는 일어서지 않는다
손은 구겨진 공책을 더듬더듬 찾고
유일한 길인 듯 무얼 쓰다가
공책이 지도인 듯 파헤치다가
서성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서성인다 수요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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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연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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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서성인다
서성대지 않는다
떠난다
떠나지 못한다
박준 말대로 사랑이 죽어가는 과정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