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도
저 고개 숙인 자의 표정을 알고 싶다
코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떤 찡그림을 발명했는지
그 찡그림을 펼치지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마른 헝겊으로 안경을 닦을 때
초조하게 뒤돌아볼 때
앞은 잠시 앗아갈 것이 많아지는 세계
새장은 모란앵무를 찾으러 떠났다*
흔들의자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림자만 남겨지는 실내악
예열된 오븐 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볼 때
밤새 얼마나 번성하게 될 것인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거나
이젠 얼마 없는 이야기
고개를 들면 모자라게 된다
뜨개질처럼 멀고 먼 생활의 과로사를 시작하게 된다
어딘가 다친 모과들을 닮아
향기를 먼저 내밀게 된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고개 숙인 자가 거느리는 밤 속에서
감긴 눈을 일으킬 슬픔이 필요하므로
어제와 내일을 교환하는 오늘을 살게 되고
고개 숙인 자리로 벌레들이
실눈을 그으며 떠났다가 뒤집혀 죽는 일로 돌아온다
찡그린 자의 얼굴을 베껴 간 벌레의 배가
이 밤에 가장 환하다
* 프란츠 카프카의 문장을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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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되는 슬픔
슬픔에게서 재주가 늘어나는 것 같아
녹슨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을 글썽거린다고 생각한 적 있었지 망설이던 말이 발을 절며 다가와 매일 낭떠러지에 있다고 나를 종용하고
이제 등에 몰두하자는 말을 했지 두 눈동자의 주름을 펼치며 바라보자고 했지 그러나 너무 많은 슬픔이 기성품이 되어 집에 돌아온다 누구나 붙잡고 말하게 되는
마른 헝겊이 모자란 세계로 출국하고 바닷바람 머금은 손수건을 선물하지 이 모르는 슬픔이 움직이는 이유를 잠깐 떠들고 싶다 비행운의 연기력처럼
포로의 잠꼬대를 닮은 위로만 해댔지 더이상 나눌 수 없는 슬픔은 등에 업고 가려고 해 그 끝이 어딘지 모르지만 헤맬수록 정확해지는 그 주소로 향하려고 해
슬픔의 묘기가 나를 흉내낸다 눈물을 훔치던 네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는지 되묻고,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간청한다 슬픔이 이렇게 반복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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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고
폐허에 다녀온 뒤로
나는 범벅이다
아름다웠던 세상에 대해 회고할 준비를 긑마친
싸움들의 혼종
어떤 기억은 장난감 기차를 타고 간다
선로에 누워 잠들었던 이는
잠깐만 이렇게 있을게
하고는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
폐허를 떠나온 뒤로
그 주소는 자꾸 선명해져만 간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사람들이
장난감 기차를 타고 떠난다
손을 흔들자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범벅이 되어 하나씩 지워간다
그러면 살 것 같았다
얼룩을 주인에게 돌려주려다가
간직하게 된다
사랑으로 생긴 무늬는
언제나 형편없이 굴고
끝나지 않기 위해 반복하는
풀벌레의 노래
개울의 첨벙거림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나는 범벅
가를 수 없는 슬픔의 혼혈
서로를 끌어안다가
가녀린 얼굴을 어깨에 포개고는
헤어지지 말자고 말하던
그 사람은 아직도 선로에 누워 있다
나는 그에게 뭐라도 묻힐까봐
범벅된 내 손 건넬 수 없고
잠깐만 자는 잠이라도 좋으니
장난감 기차는 멀리 흘러가거라
풀벌레 실컷 우는 저녁 속으로 들어가
사랑은 계속 뒤섞일 테니
가장 아름다운 범벅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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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티브이에 춤추고 노래하는 내가 나온다
생선을 바르다 말고 본다 이 무대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할 댄스 가수 얼굴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술 취한 자들의 노래만큼 엉망이었지 흥얼거리다 사라질 이름인데 너무 오래 쓴 거야 돌려주긴 그렇고 버리는 것이지
나도 잃어버린 것을 주워다 썼으니까
코러스 없이는 노래를 못해요 무반주는 아주 곤란해요 악보 볼 줄 몰라요 춤은 자신 있어 함성 질러주면 노래 열심히 안 해도 될 텐데
무거운 가발을 벗으면서 묻기를, 시작하는 게 두려워? 끝내는 건? 남겨진 질문에 흔들리는 귀걸이의 큐빅으로 대신 말한다
잘 모르겠어 모르는 게 많아 신비로울 줄 알았던 텅 빈 해골에 사람들은 찬사를 보내고 내장까지 꽉 찬 헛기침으로 구름을 걷고
내가 누군가의 기분이 될 수 있으리라 당신의 흥미를 비틀거리게 하리라
하지만 난 신의 오르골이 되었지 이쯤 해둘까 끝나지 않는 인터뷰 말미에는 말하게 될 것
무대를 떠나겠다고, 내가 남긴 노래 내가 남긴 말, 나의 춤보다 먼저 늙어버릴 육신!
질 좋은 무대의상이 있었지 출처도 모를 협찬이었지만 전 재산을 바쳐 그것을 걸쳐 입고 마지막 무대에 올라선다
밥상 밑에서 맨발을 긁적거리며 하얀 생선살을 가지런하게 바르고 있었다
노랫말처럼 살다 간 사람이 있었다네 베스트 앨범에선 아직 분장을 지우지 않고 잠든 이가 깨어나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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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한 사랑에 관하여
아내는 내게 오라고 하였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그것이 침대 귀퉁이만 돌아도 갈 수 있는 일인지, 맨발로 유리 조각을 지나야 하는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 남았고 나는 숲에 불을 지른 것 같다
불이 끝나는 쪽으로 향하기 위하여
마주댄 것이 많아 타오르기가 쉬웠다 그 숲에서 아내는 물을 심어둔 것 같다
괘종시계 앞에서 불확실한 것과 손에 쥔 영수증 앞에서 불투명한 것이 우리를 각각 다른 곳으로 불러냈다 사랑을 멀리하라는 신의 계시였고 거역했지만 나와 아내는 거의 동시에 제 발로 사랑을 빠져나왔다
살려달라는 말을 둘재 아이처럼 낳고
아픈 사람에게는 가고 싶거든, 첫차든 막차든 빨리 가야만 한다는 이 심정을 해치우고 싶으니까, 그래도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야채죽의 당근을 건져올리는 플라스틱 숟가락
이마에 얹어보는 차가운 손바닥
그런 사랑의 도구는 유물이 된 것 같다
아마도, 아내는 괘종시계를 저수지에 던지며 시간을 회고하거나 물이 불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불을 지핀 사람은 불을 끌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를 자꾸 불러내고
저멀리 그을린 그네가 흔들린다
우리는 서로의 마지막 암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랜 풍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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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윤후,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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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불온한 상상의 독백은 때로 낯설거나 때때로 친밀하다
(물론 좋지만은 않은 기억들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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