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단테, 정독 2023. 3. 13. 18:20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할아버지께서 노래를 찾아오라고 하셨다 
       어떤 노래를요? 
그건 차차 알게 될 거라고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이윽고 문지기를 만났다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신발을 벗어주면 문을 열어주지 
나는 문지기에게 신발을 벗어주었다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윽고 양 치는 목동을 만났다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너의 그 근사한 외투를 벗어주면 양의 노래를 들려주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목동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외투를 벗겨 달아났다 
 
오들오들 떨며 달의 분화구를 향해 갔다 
거기서 잠시 추위를 달랠 요량이었다 
그곳엔 행색이 초라한 사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아저씨, 일어나보세요 저는 노래를 찾으러 왔어요 
       얘야, 나도 노래를 찾아 수백년을 걸어왔지만 
       노래는 어디에도 없고 이제 더는 걸을 수가 없구나 
그의 가방 속에는 녹슨 아코디언이 들어 있었다 
건반을 눌러봤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갔다 
나는 내게 남은 모든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혔다 
       저 해는 아저씨의 심장 같아요 
밤이 되어가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결국 나는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할아버지, 이 땅엔 노래가 없어요 
울을을 터뜨리는 내게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벌거숭이의 노래를 가져왔구나, 얘야 
       그건 아주 뜨겁고 간절한 노래란다 
 
 
 
 
 
:: 메모 :: 
 
동화 같다. 화자는 어린 소녀다.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노래를 찾으로 멀고 먼 여정을 다녀왔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각자의 사연을 갖고 그를 배신하고 탐욕하고 위로한다.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면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근본적인 절망을 위로하는 말투는 그래서 따뜻하고 또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