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오규원, '비가 와도 젖은 자는' ("사랑의 기교", 민음 1978)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4. 6. 27. 03:59





   비가 와도 젖은 者는
   - 巡禮 1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 후 그 자리에 머물고싶어
   다시 한 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江은 젖지 않는다.
   나를 젖게 해 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江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 자락도 잠시만 머문다.

   魚族은 강을 거슬러 올라
   하늘이 닿은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번뇌, 날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者는 다시 젖지 않는다.


   * 오규원, 사랑의 기교 (민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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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모 ::

   그러므로,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과 마음을 얻었다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 황지우, <산경> 중에 (게 눈 속의 연꽃, 문지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