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 8

유보적인 단어들

유보적인 단어들 이상하지 않니 저 아름다움을 관찰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움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문을 열면 어둠이 이동한다 눈밭 위에서 우리는 덜 검은 것이라 불리기에 적당했다 입고 온 하얀 스웨터를 부를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 김리윤, '비결정적인 선'에서 ("투명도 혼합 공간", 문지 2022) 한참을 서성였다 마지못해 한 마디 말이 식사 인사라면 우린 헤어졌을까 끝끝내 답을 찾지 못하였고 함께 한 시절들이 있어서 좋았다 어느 차가운 겨울밤 네가 건네준 따뜻한 위로처럼 어느 선선한 새벽에 말갛게 웃던 네 대화창처럼 때때로 신선한 기운은 연초록 잎으로 무성하고 함께 그리워한 시절들도 있었다 어느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고 어느 장면에서는 눈자위가 흐려지기도 했었다 남들 몰래 키워..

글/습작 2024.09.23

정호승, '서울의 예수'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하루한편] 만약에 나한테 '종교' 같은 게 있다면 : 서울의 예수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문학앨범/필사 2024.09.22

추석

추석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적당하게 이어진 끈 야무지게 매듭을 짓고 하늘에 연을 띄우면 그만큼 넉넉해지고 아직은 차가운 물밑 그래도 따스한 돌 하나 무심히 줍고 또 쌓으면 물가에 세운 5층 석탑 그만큼 그리워지고 # 추석이라 졸필의 인사부터 드립니다. 넉넉함과 그리움이 깃든 명절 한가위답게 모쪼록 보고팠던 분들과 행복한 시간 한가득 보내시고 (혹 그렇지 못하면 그러려고 노력하는 시간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연휴 되시기 바랍니다. ## "시를 쓰는 일 못지않게 시를 소개하는 일을 계속 해왔다. 시는 과일의 향처럼 향이 은은하게 좋다. 흐릿한 듯해도 빛이 가만하게 나온다. 무너진 가슴인 줄 알았는데 가슴에 다시 파릇한 싹이 조그많게 움튼다. 시는 언덕과 같이 보다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어디에서..

글/습작 2024.09.16

원태연을 닮았나

원태연을 닮았나 때때로 어쩔 수 없음은 명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원태연을 닮았단 소리를 들으며 시를 쓴다는 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풀잎에 이는 거품 같은 방울들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가을밤 무지개를 대신한 구름들을 닮아 바람이 한줄기 속삭이고 나면 원태연이 쓰지 못한 시는 무얼까를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저 속절없음이기에 때때로 풀잎에 인 방울들이 무지개를 대체하고 찰나의 순간을 목격한 그림자들만 웅성대도록 구름들을 닮은 시를 써보기도 하였습니다 새벽을 머리에 인 채 유유히 흐르는 구름 달빛, 몇 자리의 별들이 함께 흐르면서 오가는 계절의 달력 몇 장을 재촉하게 되면 원태연을 닮은 정서가 불쑥 일어서기도 해 가끔은 도로 눈을 감았습니다 때 늦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구월..

글/습작 2024.09.11

감지하지 못한 우연은 트로이의 필연일 뿐

감지하지 못한 우연은 트로이의 필연일 뿐 허연의 시를 읽는다 참담하다는 말을 배워가는 중이며 참담한 현실에 괴로워하는 중이다 시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를 비루한 감정들은 결코 쓸모없음을 그 쓸모없음을 꼭 노래해야 할까를 미처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어쩔 수 없음이란 말 앞에 붙여둔 갖은 핑계와 섣부른 설렘의 진자가 내 시간들을 온통 갉아먹었다 얼마나 더 쓰라려야만 하는지 얼마나 더 몹쓸 경우를 겪어야 할지 그걸 미리 넘겨짚지 못한 어리석음 결국 낙엽처럼 쌓일 마음의 상흔이 실은 말 못 해온 진실의 불편함인지 끝끝내 숨겨둔 가슴의 치부였는지 아프다고만 말해다오 이미 나는 아프므로* * 감정이란 그저 물가에 주저앉는 속수무책일 뿐... #

글/습작 2024.09.06

허연, '불간섭' (불온한 검은 피, 민음 2014)

불간섭 단풍을 강요하지 말게나 혹은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늘을 주장하지 말게나. 마른 손가락 허물이 벗겨지는 걸로. 밤공기가 부담스러운 걸로 마음은 또 기다림 뒤의 겨울이나 봄에 있고 은행 썩는 냄새가 싫으면 그뿐 북간도 같은 데나 있을 짧은 가을을 마음속에 밀어 넣지 말게나. 굴다리 포장마차에서 생선 타는 연기가 나면 그뿐 담장 너머 진홍빛 감을 애써 꺾으려고 하지는 말게나. 가을이 가면 그뿐.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 2014) :: 메모 ::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 #

문학앨범/필사 2024.09.05

배신

배신       누군 하고 싶어 하겠냐며    어쩔 수 없이 그리 되었다고    내 맘도 내 맘 같지가 않다고    고래고래 악을 써보지만    결론은 달라지지가 않는다     슬프다    폐허가 된 믿음의 가시가 박혀    심장에서 마구 피가 흐르지만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일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일     누군 그러고 싶었겠냐며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올려    하지만 내 맘 같지 않고서야    그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그래서 쓸쓸하기만 한 일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그래서 늘 마음이 아프다    가장 사랑한다던 사람한테    가장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       그걸 늘 나만 몰랐었구나    그저 어리석은 내 탓이거늘        #

글/습작 2024.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