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정지용, '노인과 꽃' ("지용시선", 을유문화사 1946)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4. 7. 8. 16:31

   
   
   
   노인과 꽃 
 
 
   노인이 꽃나무를 심으심은 무슨 보람을 위하심이오니까. 등이 곱으시고 숨이 차신데도 그래도 꽃을 가꾸시는 양을 뵈오니, 손수 공들이신 가지에 붉고 빛나는 꽃이 맺으리라고 생각하오니, 희고 희신 나룻이나 주름살이 도리어 꽃답도소이다.
   나이 이순을 넘어 오히려 여색을 기르는 이도 있거니 실로 누하기* 그지없는 일이옵니다. 빛깔에 취할 수 있음은 빛이 어느 빛일는지 청춘에 맡길 것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쇠년*에 오로지 꽃을 사랑하심을 뵈오니 거룩하시게도 정정하시옵니다. 
   봄비를 맞으시며 심으신 것이 언제 바람과 햇빛이 더워 오면 고운 꽃봉오리가 촉불 켜듯 할 것을 보실 것이매 그만치 노래*의 한 계절이 헛되이 지나지 않은 것이옵니다. 
   노인의 고담*한 그늘에 어린 자손이 희희하며* 꽃이 피고 나무와 벌이 날며 닝닝거린다는* 것은 여년*과 해골을 장식하기에 이렇듯 화려한 일이 없을 듯하옵니다. 
   해마다 꽃은 한 꽃이로되 사람은 해마다 다르도다. 만일 노인 백세 후에 기거하시던 창호가 닫히고 끌앞에 손수 심으신 꽃이 난만할 때 우리는 거기서 슬퍼하겠나이다. 그 꽃을 어찌 즐길 수가 있으리까. 꽃과 주검을 실로 슬퍼할 자는 청춘이요 노년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분방*히 끓는 정염*이 식고 호화롭고도 홧홧한 부끄럼과 건질 수 없는 괴롬으로 수놓은 청춘의 웃옷을 벗은 뒤에 오는 청수*하고 고고*하고 유한*하고 완강하기 학과 같은 노년의 덕으로서 어찌 주검과 꽃을 슬퍼하겠습니까. 그러기에 꽃이 아름다움을 실로 볼 수 있기는 노경*에서일까 합니다. 
 
   멀리멀리 나 ─ 따* 끝으로서 오기는 초뢰사의 백목단 그중 일점 담홍빛을 보기 위하야. 
 
   의젓한 시인 폴 클로델*은 모란 한 떨기 만나기 위하야 이렇듯 멀리 왔더라니, 제자위*에 붉은 한 송이 꽃이 심성의 천진*과 서로 의지하며 즐기기에는 바다를 몇씩 건너온다느니보담 미옥과 같이 탁마*된 춘추를 지니어야 할까 합니다. 
   실상 청춘은 꽃을 그다지 사랑할 바도 없을 것이며 다만 하늘의 별, 물 속의 진주, 마음속에 사랑을 표정하기 위하야 꽃을 꺾고 꽂고 선사하고 찢고 하였을 뿐이 아니었습니까. 이도 또한 노년의 지혜와 법열*을 위하야 청춘이 지나지 아니치 못할 연옥*과 시련이기도 하였습니다. 
   오호* 노년과 꽃이 서로 비추고 밝은 그 어느 날 나의 나룻도 눈과 같이 희어지이다 하노니 나머지 청춘에 다시 설레나이다.  
 
 

   * 누하기 : 누추하기 
   * 쇠년 : 늙어서 쇠약하여 가는 나이 
   * 노래 : '늘그막'을 점잖게 이르는 말 
   * 고담 : 서화, 문장 등이 속되지 아니하고 인품이 있음 
   * 희희하며 : 희롱하여 노는 것이 즐거우며 
   * 닝닝거린다는 : '잉잉거린다는'의 변형. 연하여 잉잉 우는 소리를 낸다는 
   * 여년 : 늙은이의 죽을 때까지의 나머지 세월 
   * 분방 : 규율이나 어떤 틀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함 
   * 정염 : 불같이 타오르는 욕정 
   * 청수 : 얼굴이나 모습 따위가 깨끗하고 빼어남 
   * 고고 : 세상일에 초연하여 홀로 고상함 
   * 유한 : 여자의 인품이 조용하고 그윽함 
   * 노경 : 늙어서 나이가 많은 때. 또는 그때 즈음 
   * 따 : 땅 
   * 폴 클로델 : 프랑스의 외교관, 시인, 극작가 
   * 제자위 : 그것이 놓여 있던 자리 
   * 천진 :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자연 그대로의 깨끗하고 순진함 
   * 탁마 : 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법열 : 참된 이치를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홀한 기쁨 
   * 연옥 :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써 단련받는 곳 
   * 오호 : 슬플 때나 탄식할 때 내는 소리 

 
 
   * 정지용, 지용시선詩選 (을유문화사,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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