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취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지줄대는 : 낮은 목소리로 자꾸 지껄이는
* 해설피 : 해가 설핏 기울어 그 빛이 약해진 모양
* 짚벼개 : 볏짚으로 만든 베개
* 풀섶 : 풀숲
* 함추름 : '함초롬'의 변형. 담뿍 젖어 촉촉하게
* 휘적시던 : 푹 적시던
* 안해 : '아내'의 고어
* 성근 : 사이가 뜬 혹은 섞여 있는
* 서리까마귀 : 찬 서리가 내리는 가을철의 까마귀
* 우지짖고 : 울어 지저귀고
* 정지용, "지용시선詩選" (을유문화사,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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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 ::
한글의 아름다움이 그 어떤 한 경지에 이르도록 시를 썼다는 정지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 실린 적은커녕 아예 '금서'로 읽히지도 못했던 지난 세월들이 참 야속하기만 하다. 정지용의 시들을 읽으면서 자꾸 가슴에서 눈물이 돋는 건 비단 그 애달픈 사연 때문만은 아니리라... 오해가 오해를 낳고 그 오해를 뒤집어쓴 사람이 백날 그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해본들 쉽사리 밝혀지지도 못하는 진실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오늘도 그런 오해 하나를 가까스로 풀었고, 그만한 노력에 상응하는 마음 속 상처가 또 다시 아로새겨진다. 아프다. 세상은 아파야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엔 내 속이 너무 많이 지쳐간다는 생각 뿐이다...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그리움만 가득한 마음, 이게 어쩌면 '슬픔'이라는 감정인지도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