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송경동, '무허가' (리얼리즘 시가 갖는 미덕)

단정, 2025. 3. 26. 06:27



   
   무허가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
   점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
   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
   노상 컨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점거하고
   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을 두번이나 점거해
   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
   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

   그런 내 삶처럼
   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
   이 세상 전체가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 시인의 말 :
     우연히 오게 되었지만......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 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 

 

 

 

   리얼리즘 시가 갖는 미덕 : 

 

 

   속칭 '현대시'를 공부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가장 기피해야 할 '레거시'로도 지탄을 받는 리얼리즘 계통의 시들이 여전히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연유는 무얼까를 잠시 생각해봅니다. (최소한 리얼리즘 계통이 아니라 해도 이와 유사한 시풍을 갖는 나태주, 박준, 이병률, 박형준, 안희연 등과 같이 시인들이 가장 널리 읽힌다는 점) 

   문창과 학생들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은유'와 '상징'이 하나도 없이 오로지 '서사'와 '진술'만으로도 시세계를 구축한다는 일은 사실 대단한 고집스러움이 아닐 테니까요.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1980년대를 풍미한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집들에서부터 황지우의 후기작들이거나 이문재의 서정까지 가미된 시편들이거나 또 아니라면 박형준의 형상화와 문태준의 시어들까지도 모두 이 방대한 범주 안에 넣어볼 수 있겠습니다. (박준의 '스토리텔링' 역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전범 중 하나이겠죠.) 

   '은유'는 제 아무리 친절하려도 노력한다 해도 여전한 '긴장'을 불러 일으킵니다. 시적 '긴장'은 뛰어난 압축미를 갖음과 동시에 꽤 오랜 울림을 함께 전해주기에 아주 중요한 미덕 중 하나가 될 거예요. '상징'은 조금 더 적극적인 경우인데 아예 현실을 비틀고 새로운 세계를 펼침으로 인해 미묘한 '아우라'를 구축하기에도 안성맞춤일 법하죠. 

   반면에 여전히 시세계에 있어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고 또 살아남을 수 있었던 큰 미덕 중 하나는 '스토리텔링'일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시라는 아주 협소한 장르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심지어는 노래) 그릇을 통해 발현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테나 역시 대한민국 문단의 큰 금자탑 중 하나일 고은의 <만인보> 연작이라거나 김수영과 신동엽을 아우르는 참여문학 진영, 또는 얼마전까지의 리얼리즘 시단 등이 갖는 가장 큰 무기 중 하나였을 게 분명합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로는 최두석의 '이야기 시'론까지도 존재했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에요.) 어쩌면 이 전통의 가장 훌륭한 후계자 역할을 한 셈이 된 현역으로는 박준을 꼽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인'과 '장마'로 대표될 그의 시세계 역시 아련한 '서사'를 기반으로 한 서정시라고 일컬을 수 있겠으니까요. 

   또 다른 한 축으로는 '진술'의 영역이 존재하게 됩니다. 송경동 시인 같은 경우는 특히 이 '진술' 쪽으로 더 특화된 감이 없지 않은데... 사실 인기가 많은 편은 못 되죠. (문창과 학생들이 특히 유념할 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이 얼마전까지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역임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워낙 오래된 기법이기도 하며, 특히 이 부분은 과거의 기라성 같은 문장들이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기에, 특히 김남주와 김용택 그리고 일명 '리얼리즘'이라고 불릴만한 웬만한 시인들의 시편에서는 항상 존재해왔던 미학이기에 더더욱 그 성취를 뛰어넘는다는 게 매우 힘든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당시의 '시대성'까지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렇겠고, 가장 최근에는 최지인 시인의 작품세계가 엇비슷한 양태를 보임에도 그 세계관의 무게감이 갖는 한계 등으로 높이 평가받지 못한 연유이기도 할 거예요.) 

   아무튼 이 '서사'와 '진술'은 비록 시라는 협소한 장르 안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하지만, 엄연히 글을 통한 문학이라는 보편적 관점에서는 항상 일정 부분 이상의 미덕을 동시에 갖는 편이기에 섣불리 이를 "올드하다"며 매도하거나 심지어는 "시가 아닌 경우"라는 공격을 퍼붓기에도 오히려 상대편 입장에서는 "네 시가 더 낡았고 더더욱 시가 아닌 경우"라는 반격을 당하기가 십상이니, 괜시리 그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해두느니 차라리 "이런 시도 있다"는 말로 얼버무리는 편이 더욱 적절하고 또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문학의 세계는 원래부터가 더 다양하면 더 다양할수록 더 좋은 법이니까요.)  

   송경동 시인이 사랑을 받는 연유는 비단 그의 시세계 뿐만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시절의 평택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 문제와 가장 최근에도 서울국제도서전 등에서 보여온 그의 행보들이 적잖은 메시지를 던져온 바 있었기에 어쩌면 그의 시보다도 그의 삶을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시인이 단지 자신의 작품만으로 그의 삶을 모두 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의 삶 전체도 곧 시라고 보는 편 역시 엄연히 존재하는 상당수 독자들의 입장일 테니까요. (더구나 이 입장은 아주 오랜 역사를 함께 갖는 지극히 도도하고도 유력한 한 '전통'이기까지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