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명랑
취한 사람들은 한쪽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 저녁에 취기들이 모여 모처럼 명랑했다
조금 후에 제가 저를 모른다 하더라도
저녁은 자유한가 시절은 듣고 있는가 따위
일행이 조금씩 더 기울어지고 있을 때
자신을 남쪽에 산다고 소개한 사람이 일어나
내 슬픔을 수신하겠다고 했다
내 것이랄 수도 아니랄 수도 없는 이 헛헛한 소유에 대해
더 기울어져야 하나
그러자 다음에 일어선 사람은 내 유언을 받겠다고 했다
불빛에 사람들의 무늬가 어른거렸다
네모 안에 고인 잡다한 공기, 어렴풋한 웃음소리
슬픔 너머 있음과 없음 너머
그 전부를 받겠다는 건 서늘한 의지로 읽어도 좋다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무엇보다 나의 것엔 불운이 깃들어 있다 말해버렸는데,
취하다가도 그런 단어엔 놀라운 기운이 들곤 하지
달리 이렇게 말해 볼까
내일 아침이 와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사람아, 내가 당신을 살게
참혹이 취기에 싸여서
안개처럼 자욱한
아름다운
그런
명랑의 자리가 있었다
# 이규리, <문장웹진> 6월호 (2021년)
...
부단한 퇴고, 시인의 '숙명' :
모처럼 이른 새벽에 시 한 편을 꺼냅니다.
다소 뜸하긴 했어도 워낙 드라마틱한 현실이 놓였음에 큰 부담감도 없이 근 일주일 가량을 손 놓고 지냈나 봅니다.
유월 들어 문학동네에서 맨 처음 나오게 될 시집은 이규리 시인입니다. (모레가 발행일이니 아직 이틀 전이긴 합니다만) 1994년에 등단을 했고,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것도 가장 핫한 '문학동네 시인선'에 이름을 올려놓는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겠어요...
"한쪽으로 이야기"를 하면 "모처럼 명랑"해지고, "조금씩 더 기울어지고" "내 슬픔"과 "내 유언"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시인은 이를 "서늘한 의지"로도 읽지만, 한편으로는 그 "참혹"과 "아름다움"을 병치해 두기로 합니다. 술을 마셔서일 겁니다. 그래도 그건 "명랑"이긴 합니다.
시인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번 신간에서 시 제목을 아예 '명랑'으로 바꾸려나 봅니다. (시집의 목차 참조.) 기울어진 생각을 다시 돌이켜 보면, 혹 또다시 고쳐야 할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 중요한 건 "내 손을 한 번 떠난 작품이 곧 화석인 것만은 아니다"는 말, 즉 부단한 퇴고의 노력이기에 이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작품에 대한 무한책임".
모든 시인들의 '숙명'입니다.
언젠가 '시인'을 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시를 쓰다가 죽는 사람"이라고 답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에 같은 질문을 또 받는다면 "평생에 걸쳐 퇴고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 같기도 해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도 첫 시집에서는 개작을 해 실렸던 바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작품도 개작 이후의 것이고요.)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화려한 데뷔 후 간호사 생활에 치중하다 무려 20년 만에야 어렵게 첫 시집을 냈던 한 시인이 심사평에 실린 황동규 시인의 말을 염두에 둔 개작을 통해 등단작을 선보인 적도 있었습니다.
모든 시인들한텐 어쩌면 교범과도 같을 태도일 것 같아 따로 또 기억해두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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