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앨범/필사

박완서, 산문 "세 가지 소원" (마음산책, 2009)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4. 7. 7. 07:28

  

  

  

   - 작가가 아끼는 이야기 모음 : 

 

 

 

   큰 네모와 작은 네모 

   

   

   미술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제출한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시던 선생님은 슬기의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손길을 멈추셨습니다. 

   슬기는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립니다.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선생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별의별 선생님 얼굴이 다 나왔는데, 선생님은 그중에서 슬기가 그린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슬기야, 이 그림 선생님한테 선물하지 않을래? 그랬더니 슬기는 기분 좋게 으스대며 그러겠다고 했고, 지금 그 그림은 선생님 방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그림은 좀 이상합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첫 미술시간이라 될 수 있으면 방학 동안에 가 본 곳이나 즐거웠던 일을 그려 보라고 했는데 스케치북 한 장을 온통 짙은 하늘색으로 칠하고 그 안에 여기저기 회색 네모들이 떠 있는 그림입니다. 이게 뭘까, 하늘에 연을 날리는 그림일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슬기는 상상력이 자유로운 아인데 여러 개의 연을 이렇게 회색으로만 칠했을 리가 없죠. 연이면 줄이 있어야 될 터인데 그것도 안 보입니다. 

   전에도 한번 슬기는 선생님을 난처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도 좋고 친구라도 좋으니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얼굴을 그려 보라고 했는데 슬기는 아무것도 안 그린 흰 도화지를 냈습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한참 찾다가 겨우 네모난 도화지 맨 밑 한가운데서 조그만 발바닥을 발견했습니다. 

   선생님은 슬기를 불러 선생님이 얼굴을 그리랬지 언제 발가락 그리라고 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슬기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아빠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대신 발가락을 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빠는 회사 일이 너무 바쁘셔서 얼굴 보기가 어렵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말에는 온종일 이불 쓰고 낮잠만 주무신다나요. 그러니까 도화지 전체가 이불인 셈이지요. 슬기가 아빠를 깨우려고 하면 아빠는 십 분만, 아니 오 분만 더 자자고 사정을 하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기 때문에 발가락만 보인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 슬기가 잊어버리고 안 가지고 온 준비물을 가지고 슬기 엄마가 학교에 오신 적이 있길래 선생님은 혹시나 슬기 아빠가 슬기에게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넌지시 그 그림 얘기를 하셨습니다. 

   슬기 엄마도 슬기처럼 명랑한 분입니다. 소리 내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글쎄 우리 애가 그렇게 엉뚱하답니다. 슬기 아빠가 회사 일이 좀 바쁘긴 해도 아이들이 얼굴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지요. 휴일은 어떡하든지 아이들하고 같이 보내려고 얼마나 노력을 한다고요. 저도 그 그림 봤어요.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아빠가 그런 아빠 될까 봐 미리 경고하는 거라고 능청을 떨면서 떡하니 아빠 머리맡에 붙여 놓지 뭡니까." 

   그래서 선생님과 슬기 엄마는 한바탕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 장난꾸러기가 그린 그림이니 혹시 보는 사람을 웃길 기발한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닌가 해서 선생님은 연방 고개를 갸우뚱,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려는 어린이 같은 표정이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자 선생님은 슬기를 불러다가 그 네모난 것들이 무엇인지 물어보셨습니다. 

   "방학 때 놀러갔던 바다에서 헤엄치는 갈치잖아요. 갈치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이거든요. 그 맛있는 갈치가 바다에서 난다는 걸 엄마가 가르쳐 주셨고요. 안 가르쳐 주셨어도 거기가 갈치의 고향이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바다에선 엄마가 갈치를 씻을 때 나는 냄새가 났어요. 그렇지만 갈치가 어떻게 헤엄치는지는 못 봤어요. 엄마가 위험하다고 먼 바다까지 못 나가게 했거든요." 

   선생님은 슬기의 얼굴만 보고도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요다음 자연시간에는 수산시장으로 현장학습을 나가서 갈치가 어떻게 생긴 생선인지 갈치의 전체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속으로 벼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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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완서, 산문 "세 가지 소원" (마음산책,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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