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맹재범, '여기 있다' (2024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단정, 2024. 1. 2. 07:02

 
 
 
[베껴쓰고 다시읽기]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말 : 
 
 
여기 있다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 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 맹재범, 2024 경향 신춘문예 당선작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첫날은 '신춘문예의 날'이므로 편지를 생략했는데도, 여지없이 많은 인사들과 축복 속에서 낙방의 고배를 든 입장에서는 결코 모든 게 다 반갑지만은 않은 노릇이기도 했습니다. 당선한 모든 작품들에게 존경과 축하를, 낙선한 모든 작품들에게도 빛 바랜 시선이 아닌 따스한 격려의 마음을 함께 갖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걸 잠시 좀 놓아두고 재정리를 하고 다 비운 그릇에 하나둘씩 차곡차곡 새롭게 쌓아보려 한 심산이 뜻밖의 오해나 서운함 속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뜸 복귀를 앞당깁니다. 
새해 첫 출근을 하는 아침, 각 회사들마다 시무식이 있겠고 또 바뀐 조직개편에 따른 업무분장도 다시금 재정비를 할 테며 일부 업무들은 아무 영향도 없이 늘상 하던대로 또 이루어질 전망입니다. 매주 화요일과 수요일의 제 일상도 그렇습니다. 변하는 부분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있는 법이니까요.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될 것이다"는 과거에 대한 위로, 현재에 대한 애정, 미래에 관한 응원을 한 마디로 고스란히 담는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 "난 전적으로 네 편이야"와도 같은 의미겠죠? 오늘 아침, 각자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와 벗들한테도 한번쯤 툭 던져놓을만한 좋은 인사일 것 같아서 제목에 적어놓았습니다. 올해 신춘문예를 준비해온 모든 이들한테도 똑같은 의미를 담아 새해 첫인사로 건네봅니다. 그동안 충분히 잘해왔고,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충분히 잘될 것입니다. 
굳이 한마디로 더 줄여본다면? 늘상 하던 표현대로 "건필"입니다. 
오늘도 행복하고 좋은 하루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cG1RKge8Sg8?si=JxBEYtphmfS_AyQ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