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12. 29. 13:25




[베껴쓰고 다시읽기] 한 해의 작도법을 접어놓는 차례 :


  원근법 배우는 시간


  빼빼 마른 여자가 바닥에 화구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집입니다
  모르는 돌과 꽃에서 뽑아낸 안료를 색색으로 펼쳐놓고
  여자는 처음 보는 새 한 마리를 그려냅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포개지고 겹쳐집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새떼입니다
  몇 마리나 되겠냐고 여자는 묻습니다
  대답을 못 합니다
  덧칠한 그림 위에 또 덧칠된 새들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자는 천천히 화구를 걷습니다

  문을 닫고 밖을 나옵니다
  방 안은 깃 치는 소리 지저귀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옵니다
  구름들 지붕들이 쏜살같이 그 집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새들이 퍼덕이며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릅니다
  왜 그 세떼가 지금도 내 주변을 맴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내가 피로 뭉쳐지던 때
  형체도 갖지 못했던 붉은 덩어리일 때의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 (창비, 2022)


  연말입니다.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은 2023년은 마지막 해넘이를 볼 수 없으리란 아쉬운 소식과 전국의 해돋이가 펼쳐질 아침이 비교적 맑겠다는 전망을 함께 내놓기 시작합니다.
  요즘의 젊은 시들이 제 아무리 현대적 기법들로 치장한다 해도 전통적인 시풍들이 갖는 미덕은 주요 문학상 수상내역들에서 여전히 위풍당당하기만 합니다. (데뷔의 순간에 불과할 '등단'만이 능사가 아니고, 그 다음의 행보들 또한 늘 고민해봐야 하는 까닭이죠.)
  한햇동안 최근 5년간의 메이저 공모전 등단작들과 주요 문학상 수상작들을 함께 살펴보면서도 그 문양들이 갖는 색채, 배경에 관한 이론들과 심사자들의 평을 참고해 일종의 '작도법' 같은 게 있다면 그 실마리도 좀 풀어볼까 했는데요...

  2023년 제25회 백석문학상의 영예는 문창과 출신도 아니고, 미래파 이후 세대들이 갖는 전위적 양태들도 아닌, 더구나 전업작가와는 영 거리도 먼 직장생활 황혼기에 접어든 한 철도원에게 수여되었었죠. 가을에 들려온 소식이었습니다.
  평생을 철도청 직원으로 살아온 시인이 과작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영예를 갖는 타이틀 중 하나인 백석문학상을 차지하게 된 건 '재능'을 넘어서는 '꾸준함'에 한 표를 더 얹을만한 교훈이겠습니다.
  결국 이번에 엮어본 '작도법'에서의 세세한 언급들이 곧 "잘 쓰면 그만이다"는 헛헛한 문장을 얼마나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까는 순전히 제 역량에서의 문제일 테고, 글쓰기에 임하는 분들께 미약하나마 보탬이라도 되었다면 큰 다행으로 여길 일이겠습니다. 올해의 '작도법'은 이번 글까지로 해 그 스케치를 접어놓고자 해요. 나머지들은 다음 시간에...

  대전에서의 무위도식도 사흘째에 접어듭니다. 시 한 편 글 한 줄을 쓰지 않은 채 지내는 시간들 속에서 과연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를, 어떤 의미들을 갖게 될 것인가를, 무엇을 더 보태야 할까를 연구해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오후입니다. 사뭇 달라져야 할 문체처럼 이 글 역시 느즈막한 오후햇살에 비쳐진 맑은 유리병에 담겨 전해질 수 있게 될까를 상상해봅니다.
  닿거나 닿지 못하거나는 전혀 별개인 문제고요...
  편안한 오후도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내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미리 새해인사를 건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늘 건강과 행복도 함께요!


  
  https://youtu.be/5g4KsIizYhQ?si=zkGVN-10RQScmH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