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문지 시인선 594호의 위용 :
뒤로 걷는 사람
그에게 세상은 한 발자국씩 넓어지는 것이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걸을 때
옆에서 커다란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한 발자국, 사과나무는 불타며
두 발자국, 사과나무는 검게 식으며
세 발자국, 사과나무는 썩은 사과 한 알이 되며
네 발자국, 깜박이는 눈꺼풀 사이로 사라진다
더러 썩은 사과 한 알이 눈에 맴돌 때면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 녹여 없앴다
그는 최소화된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했다
눈이 오던 어느 날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점이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뒤로 갈 때마다
점은 세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오며 커지더니 다리를 뻗고 손을 흔들며 마침내 웃어 보였다
달려오던 점은 그의 코앞에서 최대화가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을 안아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를 툭 치고는 그의 바로 옆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굽혔다
썩은 사과들이 눈밭에 우르르 쏟아졌다
* 박세미, 오늘 사회 발코니 (문지, 2023)
대한민국 시인이라면 가장 큰 꿈이 뭘까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굵직한 문학상 수상이 제일 먼저 떠오르기는 해도 한편으로 제 생각에는 아마도 문지 시인선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는 게 가장 큰 꿈 중 하나는 아닐까 합니다. (물론 신경림, 마종하, 강은교, 민영, 박노해, 김남주, 정희성, 도종환, 장정일, 정호승, 이문재, 김사인, 안도현, 원동우, 김지연, 박미란, 주하림, 손택수, 이해존 그리고 황인찬 같은 거룩하고 쟁쟁한 이름들이 여전히 빠져 있다는 것 때문에 이게 꼭 '전체'를 지칭할 수는 없겠지만요... 500호 기념 앤쏠로지에서도 이로 인해 문학과지성사 스스로 꽤 많이 고민해왔음을 함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신작시집들을 살펴보는데 문지 시인선이 어느덧 594호까지를 펴낸 걸 알게 되었고, 이제 곧 내년 초에는 600호 기념 앤쏠로지 출간도 앞둘 태세입니다. 현재까지 가장 많은 시집들을 펴낸 곳이기도 하며, 그 클래스도 사실상 '국내 원톱' 격인 문지 시인선은 그 한 권 한 권마다 모두 필독서일 만큼 중요한 목록이기도 해요...
일요일 아침 기온이 무려 영하 12도까지 떨어져 바깥은 몹시 춥습니다. 어떻게든 집안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하루일 테죠. 신춘문예 당선 소식은 이제 약 일주일 정도 안에 모든 당선자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넬 것으로도 보여집니다. 한 해를 불굴의 노력으로 경주해온 당선자들에게는 뜻깊은 축하를, 또 낙선하신 더 많은 분들에게는 넉넉한 위로를 함께 전하겠습니다.
(당락에 연연치 않을 정도로 이미 충분한 습작량을 기록하고 계시는 분들께도 여전히 '문우'로서의 우정을 표해놓습니다.)
P.S. 어제 일부 지인들과의 대화 도중에 농담삼아 “새로 나온 국민교육헌장” :
우리는 이 땅에 책을 남겨야 할 의무를 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여 책을 쓰고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한다. 더구나 자가출판은 이제 출판비용도 제로다. 일기도 편지도 잡글도 모두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작가의 지표로 삼는다.
어느 학교 나왔냐 묻지 말자.
등단은 하셨냐고도 묻지 말자.
어디로 등단했냐고도 묻지 말자.
좋은 책 몇 권이나 냈느냐고 묻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