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최하림, '컬럼버스여 아메리고여' (편집은 기억을 단절시킨다)

단정, 2023. 12. 16. 05:41

 

 

 

[베껴쓰고 다시읽기] 편집은 기억을 단절시킨다 : 

 

 

   컬럼버스여 아메리고여 

  

  

   바람 센 지방에서는 지치고 시달린 사나이들이 

   오랜 날의 바다로 나와 밤 별이 성성한 거리를 걷는다 

   바다의 비늘에 어린 아주 순수한 소리를 들으며 

   소리 속으로 들어간다 한 줄의 도로가 흐르는 소리 속으로 

   소리의 밑바닥에는 쥐들의 짹짹이는 소리 들리고 

   굶주림이 들리고 쓴 슬픔을 토해내면서 

   해안의 개들이 컹컹 짖는다 그 개들의 

   검디검은 울음이 분별할 수 없는 

   피부를 물들이면서 

   이방의 거리를 헤매게 하고 

   언제나 이방인이게 하고 

   비열함으로 이루어진 걸음을 흔들면서 

   사방의 나무잎처럼 있는 그대들의 모습 

   무얼하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무얼하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개짖는 소릴 듣는가 그대들을 뒤쫓는 소리가 아닌가 

   쫓기고 쫓겨서 극지로 가거라 

   그곳의 풍습을 따라 그대들의 아내를 

   바다로 돌려세우고 밤에도 쉬지 않고 

   불사의 영상을 만들어 바다에 띄워라 

   우리들이 말한 우리들의 희망의 바다 

   아무런 희망이 없어도 우리들을 헤매게 하는 바다 바다여 

   아무런 희망이 없어도 우리들을 바다에 띄워라 

  

  

   * 최하림, 우리들을 위하여 (창비, 1976)

  

  

   주말 아침입니다. 모처럼 문지 시인선 500호 기념 앤솔로지를 다시 꺼내 읽다가 조연정이 쓴 발문에서 한참을 서성였나 봅니다. 오늘 아침의 인사가 늦어진 까닭입니다. 대뜸 생각난 시가 있어 네이버 검색창에 아무리 키워드를 넣어도 도통 검색결과가 "0"인 시 한 편이 있어 제 오랜 책장에서 누렇게 뜬 옛 시집을 또 꺼냈고 이렇듯 필사를 해 올려놓습니다. 최하림의 시는 무려 1965년도의 작품이었으니 대략 58년의 세월이 흐른 셈입니다. 인터넷이 제 아무리 '정보의 바다'라 해도 누군가의 편집으로 인해 그 안에서의 세계는 항상 실제 세상과는 엄연히 다른 일종의 '메타버스'인 셈이겠죠. 편집의 역할 못지않게 그 한계를 늘 인식하는 편이 유익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때때금 오프라인을 더 중요시할 경우가 많게 됩니다. 특히 친구들의 사이나 장례식장 같은 경우들이 그렇고 여행 또한 마찬가지일 테고요.)  

   아침의 카카오톡이 영 반갑지 못한 분들도 계셔서 점점 더 제 전송 버튼도 느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벽 세시 경에서 얼추 다섯 시 이후로 늦춰진 셈인데, 그렇다고 별 일 없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기상시각은 한두 시로 훌쩍 더 앞당겨진 탓에 꽤 고민이 많아집니다. 생활패턴을 다시금 갱신해야 할 수도) 

   날씨가 꽤 추워졌습니다. 따뜻하고 평안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조연정의 글 일부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맺도록 하겠습니다. ;

   "문지 시인선 100호 기념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은 "시는 언제나 사랑이어야 하"며 "폭력으로 떨어진 세상은 시를 통해 구원의 지평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300호 기념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 이광호가 "사랑은 여전히 당신과 나를 다른 시간에 살게 하는 힘이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랑의 힘은 시의 힘과 등가라 할 수 있다. 한 출판사에서만 몇백 권의 시집이 출간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 시는 이른바 '사랑'이자 '구원', 결국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말해볼 수 있는 것이다."  

        

   

 

https://youtu.be/fzNWKIdnTHU?si=cQxKjw2twDjd7u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