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박정대, ‘음악들’ (‘모작’의 한 형태, 화답시)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12. 15. 06:20




[베껴쓰고 다시읽기] ‘모작’의 한 형태, 화답시 :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대,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 2001)


  …


  음악들


  음표가 없는 거리를 걷다 마주치는 선율이 있다면, 꽤 익숙하고도 낯선 화음들이 공중에 퍼지면 하늘 위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저절로 걸음을 멈춰 음표들을 찾기 시작하면. 이윽고 전기기타의 독주가 울려퍼지면 비로소 아아 그 노래, 하며 반가이 맞고. 내겐 길거리가 곧 콘서트장이고, 길가에 빼꼼히 놓인 스피커도 웅장한 앰프가 되고 가슴은 쿵쾅대면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기만 하고, 먼 시절의 나를 추억하듯 저절로 몸이 가벼워져 발끝에 힘을 주고 내내 음표들을 새겨넣으면.
  때로는 길가에서 마주친 인연들이 제법 가벼울 때가 많아서, 깔깔대며 웃는 교복입은 학생들은 두 손을 펼치며 하나의 율동이 되고, 단 한 번 춤을 춘 적 없는 내가 발끝을 까닥이면 금세 구두 끝이 닳아서. 그 시절의 내가 사랑한 화면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가방을 찾아 넣으면.
  어느새 노래가 끝나면, 다시 웅웅대는 소음들을 향해 걸으면, 머물렀던 순간들을 지운 채 총총히 재촉하는 거리의 끝에선 항상 말갛게 핀 햇빛이 눈부시기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