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뛰어난 문장’이라는 말, 시인의 산문 쓰기)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8. 7. 04:32




[베껴쓰고 다시읽기] ‘뛰어난 문장’이라는 말, 시인의 산문 쓰기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어둠을 겹쳐 입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가지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물방울이 흘러나와 더 자라지 않는,
  고목나무 살갗에 여기저기 추억의 옹이를 만들어내는 시간
  서로의 체온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하며
  잎들이 무섭게 살아 있었다

  천변의 소똥 냄새 맡으며 순한 눈빛이 떠도는 개가
  어슬렁 어슬렁 낮아지는 저녁해에 나를 넣고
  키 큰 옥수수밭 쪽으로 사라져간다
  퇴근하는 한 떼의 방위병이 부르는 군가 소리에 맞춰
  피멍울 진 기억들을 잎으로 내민 사람을 닮은 풀들
  낮게 어스름에 잠겨갈 때,

  손자를 업고 나온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지붕에 널어 말린 생선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하고,
  熔岩처럼 흘러다니는 꿈들
  점점 깊어지는 하늘의 상처 속에서 터져나온다
  흉터로 굳은 자리, 새로운 별빛이 태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
  순한 개가 나의 육신을 남겨놓고 눈 속에 넣고 간
  나를, 수천만 개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담고 있는
  멀리 키 큰 옥수수밭이 서서히 눈꺼풀을 내릴 때



# 박형준,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문지, 1994)



-


  
숨막히는 열대야가 있겠고, 또 주중에는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하리라는 예보까지 있습니다.

‘뛰어난 문장’은 쟝르나 형식을 뛰어넘는 속성을 갖기에 노랫말이든 소설의 한 구절이든 시 한 편을 들이밀게 되더라도 결국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어법은 같습니다. (김승옥의 감각적인 문체는 한 편의 시를 가볍게 능가해온 이력을 갖기도 하죠. 박경리의 서사와 최인훈의 사유 역시 비슷한 힘을 가졌습니다. 필사에도 아주 큰 도움과 깨달음을 주던 경험들이요 훌륭한 스승들입니다.)
박형준 시인을 저번에 한번쯤은 제대로 소개해본 적도 있던 것 같은데, 오늘은 그의 대표작 격인 데뷔시집의 표제작과 또 함께 실렸던 짤막한 산문을 함께 꺼내보도록 합니다. ;

(이하 인용)  

“모두가 죽지 않는 유년의 王國에서,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어 죽은 사람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풍경 속에서, 마치 오세기나 그 이전의 깊은 지층에서 살아나는 듯한 추억 때문에 숟가락을 놓쳐본 적이 있는가.

나무 뒤에 숨어 바라보는 집과 집 뒤에 숨어 바라보는 나무는 늘 슬픔에 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짙은 연못을 바라보는 일만으로 하루를 보내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참담한 人生인가를.

한번도 슬픔을 완성하지 못했고 완성된 것은 슬픔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새벽 거리를 떠도는 불빛 하나가 빗물 고인 웅덩이에 내려와 푸르스름한 떨림을 이루고 있다. 그 속에는 몰래 꿍쳐둔 빨래처럼 잎들이 가지에 꾸욱 달려 있다.

구름, 하늘의 자라기 한쪽 부서진 자리, 파란 눈빛 속에 잃어버린 주소지를 담고 있는 집 나온 고양이, 짙은 숨소리, 고동, 빗물 고인 웅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