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진은영, ‘청혼’ : 감각적 사물들이 서정을 빛내는 순간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8. 4. 20:07

  


[베껴쓰고 다시읽기] 감각적 사물들이 서정을 빛내는 순간 (진은영, 청혼) :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 계간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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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아름다운 시”라는 찬사를 들으며 지난해에 열렸던 창비의 제24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입니다. (원래는 지난 2014년에 <창작과비평>을 통해 발표된 시였다가, 10년만에 새롭게 발간된 작년의 새 시집에서 권두시로 함께 실리기도 했죠.)
   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시인은 송기원이었습니다. 그의 데뷔작인 ‘회복기의 노래’에 관한 심사평은 두고두고 회자된 칭찬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춘문예에 응모해줘서 고맙다"는 인삿말이 등장했습니다.)
   마치 "연초록으로 물들고" "야광충이 되어" 떠돌던 그것처럼 "오래된 거리"와 "순결한 비누거품" 또 "투명 유리조각"은 눈과 귀를 유혹하는 즐거움입니다.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을 서사, 또 노래 한 곡조를 대신할만한 리듬과 운율, 그리고 또 한 편의 그림이 빚을 법한 풍경과 순간 등을 고루 담는 미덕이 시의 한 정점임을 깨닫게 하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이하 인용)

   “진은영이 추구하는 시는 무의식적 차원의 ‘감각의 재분배’(자크 랑시에르)를 통해 세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운동이다. ‘사랑’과 ‘혁명’의 동의어인 이 운동은 세계가 그대로여도 주체가 위치와 행위를 바꿈으로써 진전된다. 진은영의 말처럼, 같은 장소도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김수이,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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