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이제니,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구체시 제1호'에 얽힌 추억, 독일 구체시 70년)

단정, 2023. 8. 7. 18:09

 
 
  
[베껴쓰고 다시읽기] '구체시 제1호'에 얽힌 추억, 독일 구체시 70년 (이제니,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오후의 오로라
                       오지 않는 비행선
                     우비는 젖지 않는다
                   없는 들판의 없는 얼굴
                   내리지 않는 비를 맞는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길은 물든다
                        날개 잃은 벌레
                      입속에 담긴 편지
                     미세레레 미세레레
                   여백에서 들리는 노래
                  몰약처럼 빛나는 눈동자
               아직도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아직도 나와 같은 단어를 쓰나요
          유리잔 바닥에 가라앉은 녹차 찌꺼기
         머릿속을 떠도는 마이너의 피아노 음계
     길게 흰 줄을 그으며 날아가는 어제의 비행운 
손끝에서 푸른빛이 나온다면 어디를 가리키게 될까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지는 물방울의 행렬
                   춥고 그리운 우기의 맛
               물고기 가면을 쓰고 걸어가는
              우기의 복화술사는 입을 다문다
                         구름       구름
                         설탕       설탕
                         창문       창문
                       제라늄    제라늄
                       빗방울    빗방울
 
 
  
   #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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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생경한 시 한 편을 꺼냈는데, 사실 이런 류의 작품들한테 모태가 된 독일의 '구체시'라는 개념은 무려 1955년에 탄생했다는군요... 꽤 오랜 전통을 갖는 이 '구체시' 역시 미술사조에서 비롯된 역사를 갖습니다. (그 이름도 어마무시한 몬드리안,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이 원조 격에 해당되는데... 사실 미술과 문학은 적용되는 양태가 사뭇 다르긴 합니다. 예로써, 미술사조 중의 '미래파'라는 용어는 현 문단에서 주되게 통용돼온 '미래파'랑은 아예 다른 성격을 갖는, 20세기 초에 기술 문명에 대한 열광적 옹호와 낙관에 기댄 입장이자 후기에는 또 하필 '파시즘'과도 연루된 바가 있었죠.)  
   전통적인 시에서 단어들이 이미지나 상징, 은유 등으로 쓰이면서 전달하려는 의미를 담는다고 본다면, 구체시는 이들을 반복해 배열하거나 일정한 법칙에 따라 늘어놓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데 초점을 두는 방식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위에서 꺼낸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같은 작품이겠죠. 올해 봄에 새로 나왔던 이소호의 시집 "홈 스위트 홈"에도 이와 유사한 작품이 실렸던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테크닉’ 면에서 가히 발군의 기량을 과시해온 것으로 평가받는 이제니 시인은 '용감하게도' 자신의 2010년 첫 시집에서 이 작품을 선보였는데요. 더 놀라운 건 이 시집이 실험적이기로 유명한 문학과지성사나 문학동네도 아니고, '리얼리즘의 총본산' 격이라 할 창비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겠죠. (이제 사실상 특정 출판사를 특정 사조나 성향 등으로 구분한다는 게 아무 의미없는 일이 되었음을 함께 시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진작에 폐간된 <시와 사회>에서 이에 관한 특집을 읽으며 처음 접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해에 썼던 습작들 중 '구체시 제1호'라는 제목을 붙인 게 있었는데,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 잠시 웃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말놀이' 형태라는 흐름도 최근까지 문단 내에서 꽤 유행을 탄 적이 있어, 이제니 시인의 다른 시집에 실렸던 '기린이 그린'이라는 작품을 함께 소개해놓고자 합니다.)    
    
       
    
   기린이 그린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그림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

   그림 속의 기린은 구름이 될 수 있다
   그림 속의 구름은 기린이 될 수 있다

   구름이 달리면 기린은 둥실 떠오르고
   기린이 눈을 감으면 구름은 잠이 들고
   잠이 든 구름 곁으로 초원이 놀러오면
   초원의 초록 들판을 기린이 가로지르고

   기린이 그린 구름이 초원 위로 흐를 때
   초원 위로 흐르는 것은 기린인가 구름인가

   대답하는 대신 다시 묻는 네가 있고
   긴 목을 휘저으며 그저 웃는 구름이 있고
   뭉게뭉게 휘날리며 흩어지는 기린이 있고
   묻는 대신 대답하는 오늘의 내가 있고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구름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그림

   그림 속 구름이 기린이 그린 그림이고
   초원 위 그림이 기린이 보는 구름일 때

   기린은 하늘을 날 수 있고
   구름은 구름을 낳을 수 있어
   초원은 마음속에 펼쳐지는 것
   풀벌레 하나까지 아낌없이 펼쳐지는 곳

   초원의 기억은 기린을 지나치고
   지나친 기억은 구름처럼 지나치고
   어제의 사람은 어제의 사람으로 흐르고

   기린이 그린 그림은 기린이 그린 그림
   구름이 그린 기린은 구름이 그린 기린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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