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2023 현대문학 신인추천작 당선작 (봉주연)

단정, 2023. 6. 17. 11:52




[주말특집] 2023 현대문학 신인추천작 당선작 :
봉주연, 주소력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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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 HYUNDAE MUNHAK

현대문학은 1955년 1월에 창간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반세기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월간 순수 문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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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입니다.
며칠전에 알려드렸던대로 올해 현대문학 신인추천작으로 봉주연 시인이 선정되었는데요,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해 시인 정끝별, 양안다 등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당선소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더 큰 주목을 받은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서도 봉 시인은 본심 대상자 14명 중 한명으로 역시 포함돼 또 화제가 되기도 했죠.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현대문학 최종 5인과 문학과사회 14인 중 봉 시인을 제외하면 중복추천자는 없었고요. 문예지들 간의 성향 차이라기보다는 "각 응모자들의 실력과 수준은 사실상 대동소이"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해요. - 한편으로 이는 가급적 자주, 많이 응모할수록 당선 가능성도 비례해 높아짐을 또 의미하고요. 부진런히 습작을 계속 해두는 편을 크게 권해온 까닭이겠죠.)
표제작 한편만 보여드렸는데 나머지 5편도 모두 필사를 해 공유해놓기로 합니다. 최근의 경향을 읽는 차원으로 일독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P.S. 굳이 이 말씀을 드리려는 건 특정 공모전 예심탈락이라고 너무 주눅들지 마시고 그렇다 해도 타 공모전에서 당선되는 경우들이 훨씬 더 많았음도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그렇다고 자뻑은 항상 경계를 해야 하지만, 무턱대고 자괴에만 빠질 필요는 없단 뜻)






   주소력(住所歷)


   그렇게 나갔다가는 추울 거야
   아침저녁으로 후회하기 위해 봄날이 있는 것 같아.

   늦은 저녁 놀이터에서 나란히 그네를 탔다. 뭐 이런 데서 놀아, 핀잔을 주면서도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 시합을 벌였다.

   식탁 아래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해. 호텔 로비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아래에 들어가기도 했다. 벙커 침대를 갖고 싶어. 어디서 그런 말을 알아 온 건지. 나는 갖고 싶은 것을 분명히 말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는 사람을 보면 스스럽게 느껴져.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 천에서. 유연함 속에서.

   어른들의 무릎까지 오는 아이들. 아이들의 정강이까지 올라온 계단 한 칸. 펜스가 쳐진 강아지 놀이터를 구경하는 사람들. 벤치를 밟고 오르면 펜스 너머를 넓게 볼 수 있다. 목을 가누는 힘을 기르라고 아이들을 일부러 엎드려 놓기도 한다.

   조그만 사람에게선 갖은 애를 쓴 냄새가 난다.

   초등학교와 유치원, 갖은 보습학원이 줄지어 있다. 하교 시간에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이 지나가면 햇볕 냄새가 났다.

   타향이 고향이 되는 거야. 어지럽게 짐이 펼쳐진 거실 마루에 앉았다. 반나절 만에 다른 곳으로 왔구나. 달라지기보다 달라지기를 결심하는 시간이 길고. 본가가 어디냐고 물으면 태어난 곳을 말해야 할지, 자라온 곳을 말해야 할지, 부모님이 계신 곳을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면 장소들이 남는다.
   잘 자라다 가요.  



   녹천
  

   푸른 강이란 뜻인가.
   내가 사는 곳에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이곳의 유래를 생각해보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아침이면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다.
   밤에는 역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고

   표지판이 보일 때마다 마을 이름의 유래를 찾아봤던 적이 있어. 한동안 지하철을 탈 때 지루하지 않았다. 너는 역과 참 가까운 곳에 사는구나.

   나의 동네는 사슴 녹鹿 자를 갖고 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내방송에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제기동에서 청량리, 청량리에서 신이문, 월계를 지나는 동안

   창밖을 보면 반칙이야.
   역의 이름을 맞추며 놀이를 하는 연인에게

   기관사의 목소리가 유일한 심판관이다.

   순록은 고작 길들여진 사슴이란 뜻이야.
   커다란 뿔을 갖고 있는 사슴이 사람에게 길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해.

   순록은 툰드라 지방 사람들에게 중요한 동물입니다. 순록 떼는 고기와 가죽, 우유와 이동 수단을 위해 키워졌으나 완전한 가축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순록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다니며 생활한다.

   길에는 새벽에 내린 눈이 한쪽으로 잘 치워져 있었다.
   너는 외우고 있는 길도 앞서 걷지 않는다.

   오랫동안 내가 푸른 강에 살고 있다 믿었다.


   * 서울동물원 동물 정보.



   덜미


   맞은편으로 사람이 오자
   우리는 한 줄을 만들었다.  

   강가에 흰 새가 잠들어 있다.
   수풀 속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손목시계가 멈춰 있다.

   올려 묶은 머리
   네 뒷목에 제비초리를 본다.

   옛사람들에게 인형극은 덜미였대. 덜미가 잡힌 인형들. 천막 뒤에서 인형을 움직이는 사람에겐 덜미가 전부였다. 관객들은 인형의 얼굴을 보겠지만 그 뒷목을 본 이는 영원히 천막 뒤에 감춰진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인형극이 끝나고 사람들은 마음을 둥글게 감아 정리하면서 서로에게 오래 감춰온 이야기를 꺼낸다. 그들 사이에 무언가 달라져 있고 더 이상 서로의 앞에선 머리를 고쳐 묶지 않게 된다.

   고백은 가슴속이 아니라 뒷목에 담겨 있다.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 사람들은 짧게 탄식했다.
   저녁의 정체를 밝혀냈다는 듯

   수풀 속에서 계속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가 좋고 너는 꼭 벌레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고 무서워한다.

   맞은편으로 사람이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걷는다.

   녹슨 농구대 옆
   전광판에는 시간도 표시된다.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가까워졌다.  


  
   신앙


   겨울새들은 털을 부풀렸지만 속은 주려 있습니다.
   오목한 것은 숨기기에 좋습니다.

   우유갑이나 플라스틱 물병에 씨앗을 채워 넣습니다.
   새들은 지구의 틈마다 남은 씨앗을 숨겨놓습니다.

   쌀알은 왜 나락의 이름을 가졌을까요.
   허기와 포만의 간격이 짧습니다.

   은隱은 다른 이름을 갖고 싶어서, 농담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났다.
   은은 벽에 새를 그려 넣기 좋아하고 가장 나중에 부리를 채워 넣는다.

   발 위에 발을 올리듯
   구두 위에 맨발을 올리듯
  
   새들은 씨앗을 숨겨놓았다는 걸 자주 잊고
   새싹은 피어날 명분을 갖습니다.

   남자는 변명에 관한 농담을 생각한다. 모래바람이나 송곳, 불이 켜지면 거두어지는 허벅지 위의 손 같은 것을.

   부리 없는 새들은 무엇으로 씨앗을 나를까요.
   입을 맞출 때마다 생각합니다.

   단단한 것은 깨뜨리기에 좋습니다.

   붓질을 더할수록 새는 사람의 얼굴을 닮아가고

   어떤 실언은 벽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벽에 난 금을 따라 다락을 짚어보다가 가장 허술해 보이는 곳에 손을 모아 속삭입니다.

   우리의 건망증 때문에 내년에도 봄이 올 거예요.

   아침에 겉옷을 챙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합니다.
   저녁엔 찬바람이 불겠지, 믿음을 가지고.



   청진


   어서 새해가 됐으면 좋겠어.
   나이를 틀리게 말해도 괜찮은 추운 나날엔
   안부를 묻기 위해 어떤 재난도 필요하지 않다.

   거실 형광등이 꺼졌다.
   어젯밤 통화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오늘 밤 한 번 더 듣게 하려.

   맞아, 여기도 어두워.

   빛은 건물에 닿아야 자신을 알게 된다던데*

   매끄러운 거실 바닥
   어둠이 유리잔에 부딪혀 깨졋다.

   아기의 손톱을 잘랐던 날
   비늘같이 얇아서 모르고 살을 조금 베었을 때
   핏방울이 동그랗게 올라오고
   아기가 울고
   네가 달려와서 말했지. 놀랐겠다, 괜찮아.

   앞으로 아기는 이것보다 더 크게 울게 될 거라고

   밖이 잠시 밝아지더니
   천둥소리가 들렸다.

   너는 투정을 부리는 아기를 안고 베란다로 나가 말했지.
   내일모레엔 까끌까끌한 바람이 불 거야.

   통화 속에서 풀어놓은 기억들에 너는 깜깜하도록 귀 기울였다.

   너도 밤엔 손톱을 자르면 안 된다는 미신을 믿니?

   내일 아침 타게 될 지하철 한 량에도
   조그마한 믿음이 여럿이다.

   네가 울어서 천둥이 치는 거라고

   가로등 아래가 환해지려면
   빛들은 빗방울에 부딪혀야 한다.

   오늘 밤 간신히 찾아낸 한 조각이 있는데
   이제 들려줄 수 있겠다.


   * 루이스 칸, "태양 빛은 건축물을 비추기 전에는 자신이 얼마나..."



   연대


   아파트 앞으로 큰 도로가 나 있다.
   복도와 가까운 쪽에 침대가 놓인 안방이 있다.
   햇빛으로부터 연약한, 가장 바깥의 안방.
   커튼은 내가 잠들기 전에 하는 버릇을 알고 있다.
   귀마개를 찾고 물 한 잔을 떠 놓는 버릇.
   소음이 멈춘다.
   커튼이 말한다.
   명심해.
   햇빛이 색이 되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가장 짙은 색을 내려거든
   지친 척을 많이 할 것.
   커튼은 내가 잠에 들 때 짓는 표정을 알고 있다.
   소음과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의 앞섶을 여며준다.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인데도
   우리는 가족이 아니구나.
   그는 단잠을 향한 나의 먼 길을 배웅해주고
   나는 커튼보다 먼저 일어난다.
   아침이 되면 올이 풀린 가르마에 빛이 모여든다.
   커튼은 하룻밤 사이 색이 옅어져 있다.
   우리가 가족이 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