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령
열까지 다 세고 나면
다시 하나둘 올라야 합니다
설령 높고 험하다 해도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합니다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뒤
걸음을 옮깁니다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어차피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만을 적기로 합니다
"우리는 목소리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다" "서리고 어리는 것들과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냈다" "흙과 종이와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장 하나의 글로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다가오는 계절의 밤은
세상에서 가장 길며
짙으며 높으며 넓습니다
# 박준, 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 2025)
...
노동절 아침에 꺼내는 시 :
명색이 '노동절'인데, 무슨 시를 꺼내야 할까를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미 '레전드'인 박노해의 시편을 꺼내기엔 그의 인스타 행보가 워낙 출중해 더 이상 꺼내기도 민망하며 백무산의 시들은 아직도 20세기를 사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기에, 비정규직의 불안함과 가난의 고단함과 전망의 흐릿함을 내내 읊던 최지인의 그것들이 더 어울릴까도 생각하긴 하였습니다.
굳이 박준의 시를 꺼낸 연유는 그가 아직 노동자의 신분을 유지한다는 점, 비로소 창비에서 시집을 냈다는 반가운 소식, 여전히 많은 이들한테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정황 때문입니다. 시의 제목처럼 '설령' 그게 잘 어울리진 않을 법해도, 또 한편으로는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입니다.
"딛고 있는 바닥부터 살펴야" 하는 생의 한 대목도 늘 "낮고 천천히 숨을 고른"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월의 첫날 같은 오늘이 그런 경우에 해당될 것 같기도 하며, "다만 이후의 시간에 관해서는 얼마간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던 시인의 말과는 달리 늘 그 이후의 시간들을 걱정하고 매달리며 현재를 보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의 기억과 나의 망각들이 사이좋게 나누어 가질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채 닫지 못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닮아간" 적이 없고, "이마를 맞대며 오후를" 보낼 만큼 넉넉지도 못했고, "수선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해도, '설령' 그와 우리의 생이 전혀 다른 감각과 경험으로 그저 '소원'할 만큼의 충분한 '거리'를 지녔다 해도 그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일은 살아있고 죽어가는 모두의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 <차이>가 낳은 비극이 있었고, 그 <차이>를 45년 동안 생각하며 지내는 오월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주 긴 연휴를 시작하는 아침일까도 모르겠네요...
의미있고 행복한 연휴기간의 첫날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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