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신춘문예 D-2. 현대시인 20선 (#11~#20)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11. 28. 04:51

 

 

 

신춘문예 D-2. 현대시인 20선 : 

(황지우, 박노해, 이성복, 정호승, 김명인, 나희덕, 장석남, 황인숙, 백무산, 진은영) 

 

11. 간절기 (김경주) 

  
  
   엄마는 아직도 남의 집에 가면 몰래 그 집 냉장고 안을 훔쳐본다
   그런 날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유 없이 화를 내던 엄마의
   일기를, 고향에 가면 아직도 훔쳐보고 있다 궁금해지면
   조금 더 사적이게 된다 애정도 없이

   내 입술이 네 입술을 떠난다 너는 카페만 가면 몰래 스푼을 훔친다
   우아한 도벽은 엄마의 철자법처럼, 걸인의 차양모자처럼 생기가 있다

   세상의 기사(記事)들은 모두 여행기다 내일이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특종들,
   사건 뒤에 잊힌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닌 적이 있다
   나는 네 가계(家系)에 속해 있다 매일 사라질 가계를 다루고 떠나는
  
   나의 행간은 활기차다 매일 똥을 오래 눈다 이것은 나의 기상에 해당한다
   내 가짜 이름은 너의 기상에 자주 등장한다 나는 네 허영이 마음에 든다
   허영이 없는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으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 푸딩을 떠먹는
   우리의 입술을 그려본다 예의도 없이

   짐승은 발톱을 깎아주면 신경질을 낸다 그렇게 서명은 피해가며 우리는
   침묵 속에서 자주 만난다 삶은 미묘한 차이를 견디는 일이다 수치심도 없이

   내가 낳은 혼혈아에게 두근거린다 이름을 지워도 결국 내 아이는 밝혀진다
   이미 나는 이 기상과 별거 중이다 나는 상투적으로 투정하며 살기로 한다
   신경질적으로 그리워지겠지만  

     
   *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지, 2014) 

 

 

   - 

 

 

12. 촉진하는 밤 (김소연)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하는 너의 몸을 
   녹여 없앴을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 촉진하는 밤 (문지, 2023) 

 

 

   - 

 

   

13. 발화 연습 문장 -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혼자이기 위해 집으로 가듯 너는 쓴다. 종이 위에서 쓴다. 흘려서 쓴다. 자신에게조차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팔분음표에 하나씩. 한 걸음에 하나씩.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끊어지듯 이어지며. 이어지듯 끊어지며. 어떤 기계음처럼. 단속적으로. 소리 아닌 소리로 발음되기를 바라면서. 발화자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다. 문이라는 듯이. 그리움이라는 듯이. 열고 열리는 마음이라는 듯이. 마음은 통과한다. 기억은 건너뛴다. 너는 너라고 썼다가 지운다. 너는 나라고 썼다가 지운다. 인칭은 끝없이 나아간다.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이인칭에서 삼인칭으로. 삼인칭에서 다시 일인칭으로. 너는 여러 겹을 가진 인칭 속으로 숨는다. 여러 겹의 목소리는 여러 겹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는 어떤 주어 속에 숨는다. 너는 어떤 술어 속에 숨긴다. 숨기기 쉬운 방식으로 서술되는 것. 서술되는 양식 그대로 변모되는 것. 변모되는 형식 그대로 변주되는 것. 목소리는 전진한다. 목소리는 굴절된다. 내면에서 내면으로. 국면에서 국면으로. 나는 지금 임의의 선분을 사이에 두고 나에게 말을 거는 연습을 하고 있다. 하나의 선분 너머로 이쪽과 저쪽이 생겨났으므로. 각각의 자리에 의자를 하나씩 놓아둔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마음이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마음이 있는 자리에 고통이 스미고 있다고 말해도 됩니까. 마음이 있는 자리에 고통이 스미고 있다고 다시 말해도 됩니까. 입 없는 발화자와 귀 없는 내담자 사이에서. 나는 지금 무언가가 무언가를 투과하는 것을 보고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고 가는 입방체의 사랑 같은 것이었으므로. 얼굴은 반쪽. 사과로 나뉘는 것. 사과는 나뉘고 그것은 조금 슬픈 기쁨을 줍니다. 조금 슬픈 기쁨을 받으면 두 볼은 붉게 물들고. 물드는 동안은 무언가 잊을 수 있습니다. 사과가 자꾸만 나뉘는 것은 열어볼 수 있는 속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루만질 수 있는 표면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는 종이 위로 끝없이 끝없이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흘려 쓴 글자들은 왼쪽 끝 맞춤으로 속속 도착하여 정렬되고 있다. 몇 개의 자음과 몇 개의 모음이 겹쳐 흐르기 시작하고. 목소리와 목소리가 더해질수록 어두워지는 어제의 입말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으므로.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있었으므로. 다시금 새롭게 보이고 들리는 장면들이 끼어든다. 고르지 않는 노면의. 갈라진 틈에서. 자라나고. 있는. 뿌리를. 내리며. 자꾸만. 자꾸만. 자리를. 벗어나는. 풀잎들. 꽃잎들. 어둡고. 좁은. 배수관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들. 한낮의. 나무. 그늘 속. 잉잉대는 말벌들의. 가없는. 한없는. 날갯짓. 차양막을 뚫고 들어오는. 헤아릴 수 없이. 멀리에서부터 오고 있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머나먼. 아침 빛의 투과율. 중단된. 생각이. 다시. 이어지는. 궤적을. 가리키는. 손가락들. 자포자기의 말을 내뱉기 직전의.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진 적 없는 사람의. 눈빛들. 낯빛들. 움츠러드는. 휘굽어드는. 구름 너머 닫힌 어깨로 둥근 나무 꺾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는. 두려움을 바라보는 두려움. 돌멩이를 바라보는 돌멩이. 눈동자를 바라보는 눈동자. 유일한 사라짐으로 유일하게 남으려고 했던 헛된 욕망들. 손톱 위의 흰 반점이 생기기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감. 흘려 쓴 것들. 흘려 쓴 것들. 흘려 본 것들. 흘려 본 것들. 환각. 환청. 환촉. 환시. 숨겨둔 목소리를 받아 적는 너의 손가락은 점점 떨리고. 불안이 잦아드는 동안 삼켜야만 했던 알약의 종류와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으므로. 언젠가부터 불안을 숨기는 대신 떨리는 손가락을 숨겨야만 했고. 너 자신도 알 수 없는 병의 이름들에 잠식당할수록. 그렇게 늘어만 가는 병명으로 네 존재를 규정당할수록.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던 사물과 사건들이. 오래도록 부당한 이름과 증후들을 뒤집어쓴 채 숨죽여왔음을 더욱 뚜렷이 인지하게 되었으므로. 흘려 본 것들. 흘려 본 것들. 복도와. 짐칸과. 계단과. 골목 사이에서. 흘려 쓴 것들. 흘려 쓴 것들. 후회와. 반성과. 원망과. 자책 속에서. 딱딱하고 각진 낱말들을 발음하면 왜 그런지 깨어 있는 기분이 듭니다. 어둠 속에서 써 내려가듯 흘려 쓴 글자들은. 그리하여. 젖어 있다. 울고 있다. 깊은 밤 잠의 한가운데에서 문득 깨어나. 너를 지나쳐 간. 너를 지나쳐 온. 너의 전 생애를 증거하는 듯한. 암시하는 듯한. 꿈의 풍경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어떤 문장을. 받아 적으려고 헸으나. 종이 위로 옮기려는 순간 무연히 사라져버리곤 했던. 그 모든 형체를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들처럼. 흘려 쓴 글자들은. 머뭇거리고 있다. 멈칫거리고 있다. 그리하여 너는 다시 흘려 쓴다. 놓쳐버린 그 문장의 질감 그대로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사라져버린 속도 그대로 뒤쫓아가야 한다는 듯이. 아주 짧은 순간 네가 보았던 그 문장들을 되찾기 위해서. 네 의식의 저 깊은 곳으로 흘려버린 그 목소리들을 되짚기 위해서. 발견되기를 바라며 흘러들듯 숨어버린 그 목소리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오직 너 자신만이 밝혀낼 수 있는 꿈의 내용을 오직 너 자신만이 써내려갈 수 있는 문장 위에 얹어두기 위해서. 문장이 되지 못한 꿈의 세부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잃어버린 낱말들로만 밝혀낼 수 있는 어떤 너머가 있다는 말이었으므로. 말할 수 없는 바로 그 자리야말로. 너의 말들과 말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곳이었으므로. 살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리하여 너는 말하지 않는 입으로 다시 흘려 쓴다. 네 속에 묻혀 있는 어떤 말들을. 사무치고 사무치는 그 말들을. 그리하여 흘려 쓴 글자들 속에서. 너 자신도 알아볼 수 없는 몇몇 글자들로 인해서. 꿈의 기억은 꿈의 기록으로 읽히기 시작했고. 꿈의 기록은 꿈의 가족이 되었고. 꿈의 가족이 된 꿈의 기록은 오래 간직해온 고통을 내면으로 내면으로 불러들였고. 고통은 그렇게 자꾸만 자꾸만 불러들여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너는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깊숙이 숨겨둔 바로 그 말들을 하나하나 내뱉기 시작했고. 그렇게 꿈의 가족은 꿈의 가죽이 되어 너의 말들을 부드럽게 받치고 있었으므로. 다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하나의 공이 흘러가듯이. 하나의 공이 흘러오듯이. 닫혀 있는 입을 대신하여 낱말들은 또 다른 낱말들로 사라지면서 흐르고 있었고. 그렇게 영원히 오고 가는. 어떤 움직임만이. 어떤 방향성만이. 발화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선분의 이쪽과 저쪽에서 자꾸만 나뉘고 있는 것은 조금 슬픈 기쁨을 주는 사과가 아니라 오래전 묻어놓은 나의 얼굴들이었고. 그때 나는 나를 감싸고 있었던 어떤 오래된 공기를 느꼈고. 공기는 외부로 흐르기 이전에 내부로부터 먼저 얼어붙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사람은 진흙처럼 흘러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닥으로부터 받아들였고.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으로 다시 되돌릴 수 있습니까. 진흙은 여기에서 그리고 저기에서 무수한 가능성으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흘러내리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시간의 틈새였고. 시간의 시선만이 시간 속을 가만히 열고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너는 시간에게 너의 눈과 코와 입을 빌려주었고. 그리하여 시간은 무수한 목소리를 뒤집어쓴 채로 뒤집히고 뒤덮이고 있었으므로. 너는 밤의 간격과 낮의 입술로 이쪽 의자에서 저쪽 의자로 다시 옮겨 앉는다. 너를 흔들어 깨우러 오는 말을 보고 싶다고 쓰면서. 울면서 넓어지는 마음을 만나고 싶다고 쓰면서. 팔분음표에 하나씩. 한 걸음에 하나씩. 너는 지금 발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너는 지금 발화 연습 문장을 쓰고 있다고 했다. 노래가 되지 않으려는 읊조림처럼. 단속적인 말의 속도로. 어디선가 단선율로 흐르는 축복송이 끼어든다.  

 

 

   * 그리하여 흘려쓴 것들 (문지, 2019) 

 

 

   - 

 

 

14.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 (황인찬)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 구관조 씻기기 (민음, 2012) 

 

 

   - 

 

 

15. 마음, 고개 (박준) 
 
 
   당신 아버지의 젊은 날 모습이
   지금의 나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잔돌을 발로 차거나
   비자나무 열매를 주워 들며
   답을 미루어도 숲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먼 이야기
   이를테면 수년에 한 번씩
   미라가 되어가는 이의 시체를
   관에서 꺼내 새 옷을 갈아입힌다는
   어느 해안가 마을 사람들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서늘한 바람이
   무안해진 우리 곁으로 들었다 돌아 나갔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당신을 보았고

   그제야 당신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으로 맞이하지 않아도
   좋았을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지, 2018) 

 

 

   - 

 

  

   16. 세상의 모든 최대화 (황유원)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 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름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 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볼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 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 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 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 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 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 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 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학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 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Joni Mitchell, 「A Case of You」 중에서. 

   ** Amy Winehouse. 

 

 

   * 세상의 모든 최대화 (민음, 2015) 

 

 

   - 

  

   

   17. 예언이 될 때까지 (오산하)  
  
     
   바라클라바가 사고 싶었을 뿐이다. 숨겨진 간판을 찾는 일. 오리무중에서 시계를 되감는다. 이곳은 오래된 빈티지 가게. 너는 발목 아래부터 차가워진다. 머리와 귀를 감싸면 체온이 올라갈 거야. 지하로 향하는 일에는 숨김이 없듯이 서리 낀 숨을 뱉는다. 구름이 심상치가 않구나. 너는 복선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고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는다. 언젠가 그 말이 예언이 될 때까지 기억해야지. 털 풍치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펼쳐 놓는 일은 쓸모없어. 그렇지만 넌 쓸모없는 일을 고집하잖아. 너는 이제 귀와 입을 막고 눈만 내놓는다.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보기만 하면서. 곧 무엇인가 저지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네. 내려온 계단으로 다시 올라가는 동안 너는 계단과 동일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찢긴 가죽과 뽑힌 털을 깔아 놓은 계단의 배를 베고 누워 잠꼬대한다. 쇄골 아래 몇 개의 점이 있는지 세어 보는 일을 하자. 쓸모없는 일을 하자. 바깥의 구름은 비바람을 몰고 오는 중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지만 구름이 심상치 않다는 너의 예언이 있었지. 찢긴 가죽을 입고 몸 구석구석 털을 심으며 바람이 몰아치는 곳으로 간다. 사람이 하는 말은 듣지 마. 나는 너를 보며 사람이 아닌 것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나 귀신, 유령, 신 같은 단어는 쓰고 싶지 않은데. 침샘이 부풀어 오른다. 입아귀보다 커지는 중이야. 나는 너를 한 올 한 올 펼쳐 놓는 상상을 하며 계단을 오른다. 발이 푹푹 빠지고 계단이 너를 한아름 집어삼키고 너는 이제 계단과 동일하지 않고 계단은 변하고 계단은 낡고 계단을 부패되고 계단은 끊어지고 싶어 한다.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자. 비바람의 반대편으로 걷는다. 나는 곧 무엇인가 저지를 것 같아. 너의 눈을 보며 이야기한다. 

 

 

   * 릿터 40 (민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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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축소 모형 (신원경) 

   

  
   스위치를 눌러
   당신이 살던 지형에 불을 붙인다

   모형은 마을의 연대기를 끌어안고 있다 첫 번째 버튼을 누르면 기원전의 세계가 켜진다 마지막 버튼을 누르면 우리가 오랫동안 사랑한 얼굴들이 잠든 땅이 밝아지고

   모형 해는 전구가 나가버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의 세포를 떼어 증식해둔 모형들이 움직여

   같은 지점에서 누군가는 귀가 중 칼에 찔려 죽고 누군가는 전쟁을 겪고 누군가는 시위를 일으켰다는 게 악법을 만들고 악법을 파기하고 오래 생각했지만 여기서 헤어지는 게 맞아 그렇다고 너와 보냈던 시간과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닐 거야 많이 배우고 웃었어 믿는다는 게

   폭설이 오래도록 내려 기록적인 땅이 되었다가
   그 기록을 부수는 비가 쏟아지고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미친 여자와
   나체로 생활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버튼을 눌러 확인해봐
   네가 살아갔던 마을의 지형도를
   나의 마을은 어느 날에는 식민지였으며
   어느 날에는 잘 다듬어진 공원이 된다

   당신은 박물관에서
   모형과 연결된 스위치 여러 개를 한꺼번에 누른다
   지나가는 두 연구원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물건을 복원 중이다 아직 용도를 몰라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는 그건
   문을 열게 하는 손잡이 같다가도
   날카로운 나이프 같아서
   스스로를 찌를 수 있게 하지
   자신의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락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도구를 어떻게든 이해하겠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모형의 중간에는
   비석 하나가 놓여 있다 해가 뜨지 않던 시절에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과 개들의 이름이 이리저리 뒤섞여 있다

   내핵 속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얼굴 하나 둘 셋……

   홀로그램 모형 안
   떠도는 영혼 하나  
  

  

   * 2023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 

 

  

19. 코트와 빛 (이하윤) 

 

 

   이것 봐 

   내 검정코트 안으로 고양이가 들어왔어 

 

   몸보다 한참 커다란 옷을 입고 

   산책로 한가운데에 앉은 네가 말했다 

   코트의 안감이 희게 반짝거렸다 

 

   나는 네 쪽으로 한껏 몸을 기울인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감긴 눈이 감긴 채로 흘러갈 수 있도록 

 

   얇은 피부 아래의 등뼈는 곧고 단정하고 

   오래도록 하얄 것이고 

 

   나는 왠지 이 온기를 품고 

   미동도 않는 고양이의 시간을 

   너와 건너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들켜서는 안 되는 마음 

 

   고양이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손이 

   모든 걸 망쳐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말은 함부로 건넬 수 없겠지 

 

   기르는 삶에 대해 

   죽은 이의 손톱처럼 계속 자라날 나머지에 대해 

 

   산책하는 모든 것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우리를 지나친다 

 

   질문이 모르는 사람에게로 뻗어나가듯이 

 

   부드러운 털을 흩트리는 

   손의 윤곽이 너무도 선명하다 

 

   고양이가 코트를 떠난다 

   발목에 묶인 시간을 내려놓으며 

 

   우리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곳으로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의 뒷면을 털어낸다 

   중요한 짐을 두고 온 사람처럼 

   자꾸만 뒤돌아보고 

 

   겨우 등을 가진 사람이 되었구나 

   나는 멀어진다는 말의 처음을 알게 된 것 같다 

 

   너의 검정 코트는 여전히 

   다른 무엇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넓고 

 

   그런 옆이 나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 2023년 창비 신인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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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골조의 미래 (이정화) 

 

 

   푹신한 의자와 비어 있는 벽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이 건네주는 사탕 두 알 

   공기가 더없이 건조해지고 
   서서히 등이 굽어질 때 묻는다 

   —그 집이 제 것이 맞을까요 

   수년간 지어온 이 집엔 각별한 애정이 있지만 
   한 발만 들여도 금세 다시 지어야 할 만큼 형편없다 

   —전 애인이 가져다준 벽돌 하나. 지문이 남은 채 굳어버린 시멘트. 이유 없이 생긴 자국들. 망치로 못을 내려칠 때 들었던 노래라든가. 한순간에 닫히는 문은 제 것이 아니었는데. 

​   선생과 나는 동시에 나무 집을 만들어간다 
   니스칠된 벽이나 바람이 끼어들 수 없는 단단함을 떠올리며 
   코앞 사탕에 손을 뻗는다 사탕 껍질을 벗겨내 입안에 굴린다 

   —함께 벽지를 발랐어요 
   이따금 거짓말이 필요하다 
   선생은 지금 나의 집을 짓고 있으니까 

   —사탕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선생과 마주한다 
   서로의 집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긴 시선 

   돌이켜보면 내가 말한 집이라는 건 어디선가 발견될 수도 있다 
   그때 나는 그 집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지만  

   —선생님, 그 집이 저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줄자로 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딱 이만큼이 너의 집이다.......... . 

   사탕 껍질을 구기고 선생의 말을 기다린다 
   벽 너머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소리 

   — 그렇지만 모든 건 영원히 당신의 것이겠죠 

   나와 선생 사이 단단한 정적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노크 없는 문. 새것 같은 폐허에 깃드는 숨소리, 컴퓨터의 작동, 선생 뒤에 여전히 깨끗한 유리와 어려운 형태의 오브제, 녹은 사탕이 혀 밑으로 미끄럽게 굴러가는데, 다시 선생과 눈을 마주한다. 등을 평평하게 편다.  

 

 

   * 2023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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