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신춘문예 D-1.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6~#10)

단테, 정독 2023. 11. 29. 02:11




신춘문예 D-1. 역대 신춘문예 당선작 10선 :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변신, 회복기의 노래, 사평역에서, 이사)

6. 목재소에서 (박미란)


   고향을 그리는 생목들의 짙은 향내
   마당 가득 흩어지면
   가슴 속 겹겹이 쌓인 그리움의 나이테
   사방으로 나동그라진다

   신새벽,
   새떼들의 향그런 속살거림도
   가지 끝 팔랑대던 잎새도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잠 덜 깬 나무들의 이마마다 대못이 박히고
   날카로운 톱날 심장을 물어뜯을 때
   하얗게 일어서는 생목의 목쉰 울음

   꿈 속 깊이 더듬어 보아도
   정말 우린 너무 멀리 왔어

   눈물처럼
   말갛게 목숨 비워 몇 밤을 지새면
   누군가 내 몸을 기억하라고 달아놓은 꼬리표
   날마다 가벼워져도
   먼 하늘 그대,
   초록으로 발돋움하는 소리 들릴 때
   둥근 목숨 천천히 밀어올리며  
   잘려지는 노을
   어둠에도 눈이 부시다

  
   *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짧은 메모 ::

   오늘이 비로소 마지막 날입니다.
   그동안 불철주야 노력해온 모든 문우분들께 진심어린 동료애를 표합니다.
   제 마지막 편지는 이렇습니다. ;

   '신서정'의 담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이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는 결국 모든 작가와 독자들의 몫이겠습니다. 다만 그동안의 용례와 용법들을 놓고 한 번 정도는 다시금 재고할 측면들을 살펴보고, 또 가능하다면 그 외연을 더 확장하여 일련의 사조처럼 당대의 '패러다임'으로 상정하려는 노력은 꽤 의미 있는 작업일 것으로도 믿는 편입니다.
   과거와의 '결별'보다는 과거와의 '연계'를 통하여,
   '은둔'해온 고백들을 꺼내 '혁명적' 낭만으로 치환하는 한편,
   또 '무기력'한 얼버무림을 극복하고자 '감각적' 문체를 총동원하는 노력 등은 지금처럼 고립상태에 빠진 대한민국 시단을 아예 뛰어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들로 가히 총천연색으로 독자들을 향해 구애를 펼칠 '수줍은' 무지개도 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작업에, 그 과정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진심으로 '거대한 뿌리'와도 같은 축복이 함께 하기를 늘 바랍니다.
   "시는 곧 진실"이라는 말을 믿기로 합니다.
   제 아무리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힘든 세상이라 해도 결국 또 언젠가는 겪어야만 할 세상의 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지쳐 스산한 마음을 어루만져줄 단 한 문장을 위해 평생을 다하는 직업이 곧 시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2024 신춘문예 응모작 중에서,

   
   - 
  
   
7. 그 노인이 지은 집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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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지명을 잊는다, 한 점 바람
   
   
   *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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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녹번동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10. 세잔과 용석 (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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