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게 눈 속의 연꽃 (황지우)
1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그대가 있다
불을 기억하고 있는 까마득한 석기 시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2
게 눈속에 연꽃은 없었다
普光의 거품인 양
눈꼽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올렸다
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
3
투구를 쓴 게가
바다로 가네
포크레인 같은 발로
걸어온 뻘밭
들고 나고 들고 나고
죽고 낳고 죽고 낳고
바다 한 가운데에는
바다가 없네
사다리는 타는 게,
게座에 앉네
* 게 눈 속의 연꽃 (문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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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길이 끝나면 (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의 희망의 시작이다
* 참된 시작 (창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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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來如哀反多羅 6 (이성복)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을 헤아리는지 모르면서
끓는 납물 같은 웃음을
눈 속에 감추고서
한낮 땡볕 아스팔트 위를
뿔 없는 소처럼 걸으며
또 길에서 너를 닮은 구름을 주웠다
네가 잃어버린 게 아닌 줄 알면서
생각해보라,
우리가 어떤 누구인지,
어디서 헤어져서,
어쨌길래 다시 못 만나는지를
* 래여애반다라 (문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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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황지우, 2. 박노해, 3. 이성복)
4.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창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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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황지우, 2. 박노해, 3. 이성복, 4. 정호승)
5. 침묵 (김명인)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길의 침묵 (문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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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황지우, 2. 박노해, 3. 이성복, 4. 정호승, 5. 김명인)
6. 입술들은 말한다 (나희덕)
입술들은 말한다
자신의 이름과 고향과 사랑하는 이에 대해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죽음에 대해
오늘 저녁 먹은 음식과
산책길에 만난 노을빛에 대해
기후 위기와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해
생일과 장례, 술과 음악, 책과 영화, 개와 고양이에 대해
마을을 휩쓸고 간 장맛비에 대해 파도 소리에 대해
얼굴도 없이 몸뚱이도 없이
격자무늬 벽에 처박힌 채 입술들은 말한다
입술들은 대체 어디서 모여든 것일까
각기 다른 언어로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기 다른 리듬으로
목소리들은 서로 삼키고 뱉고 다시 삼키고 뱉고 삼키고
들리지 않는 노래를 너무 많이 들었나봐
귀가 먹먹해
먼 들판에 풀벌레 소리 자욱해
못이 박힌 노래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나봐
귀는 매일 투명한 피를 흘리고 닦아내고 다시 흘리고
격자무늬 벽 속에서 입술들은 말한다
오늘도 잠 못 드는 이유에 대해
왜 자신이 이야기를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복용해온 약에 대해
또는 피 흘리는 말, 다른 입술들에 대해
* 가능주의자 (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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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황지우, 2. 박노해, 3. 이성복, 4. 정호승, 5. 김명인, 6. 나희덕)
7. 추억에서의 헤매임 (장석남)
1
추억이 아픈 모양이다
손톱 속으로 환한 구름이 보이고
길모퉁이를 지키는 별이
낭하 긴 가슴을 눈여겨 쳐다본다
겨울이 오고 눈이 내리면
눈발들에게 방을 내줄
커다란 나뭇잎
추억의 음악이 떨리는 모양이다
답십리 쪽에서 구겨진 도화지처럼 연기가 올라간다
황무지 다섯 평
나의 마음이
눈빛이 딱딱한 마른 물고기를 구워 소풍가고 싶어한다
2
옛집 집 앞 옥수수밭에 바람이 덮치나
가슴이 실타래처럼 얽힌다
얽힌 실타래 속 물고기 한 마리
입 속에 환한 불이 켜져 있다
어머니는 해마다 밭둑에 옥수수를 심어
우리집 울음을 대신 울게 했지 아침이면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옥수숫대가 있었어
3
새벽에 가을 나무를 보면
애정이 꽃피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 다 바람 불어간 후
근심의 밑바닥을 바라보면
비로소 애정이 꽃피는,
가지들이 너무 무거웠으므로 나는 너그럽지 못했다
나는 오늘밤 마른 물고기를 타고
진흙별에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 두 눈 친친 동여맨 나의 사랑이 있으므로
*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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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황지우, 2. 박노해, 3. 이성복, 4. 정호승, 5. 김명인, 6. 나희덕, 7. 장석남)
8. 자명한 산책 (황인숙)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
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
살랑거리며 말라가는
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
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
막얀 숲 속이라면
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 조심할 텐데
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
낙엽 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
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
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
나는 자명함을
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
내 발바닥 아래
누군가 발바닥을 맞대고 걷는 듯하다
* 자명한 산책 (문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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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황지우, 2. 박노해, 3. 이성복, 4. 정호승, 5. 김명인, 6. 나희덕, 7.장석남, 8. 황인숙)
9. 인간의 시간 (백무산)
마른 풀잎 위로 부드러운 빗방울이
깃털처럼 내린다
구름은 산자락까지 내려와
게릴라처럼 주의 깊다
비에 씻긴 바람도 저희들끼리
아주 주의 깊게 착지를 찾는다
개울은 작은 풀씨 하나라도 깨울까봐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시간은 자신의 거처를 몰라 머뭇거린다
나무들도 옷을 벗는다
지난 가을에 외투만 벗은 나무는
마지막 단추까지 푼다
소리없이 안으로 옷을 벗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지에 무슨 음모가 시작되는가
새들도 숨을 죽인다
언제 명령이 떨어지는가
누가 발진을 지시하는가
시간도 순응하는 시간
일사불란한 지취계통도 없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흘 알갱이 하나하나 수소처럼 가볍다
새들도 숨을 죽인다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
소모와 죽음의 행로를 걸어온,
날로 썩어가고 황무지만 진전시켜온
죽은 시간을 전복시킨다
대지는 단절을 꿈꾼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대지는 이렇게 혁명을 하는 것
잠든 씨 알갱이들과 언 땅 뿌리들을
불러내는 것은 봄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밀어올리는 것
생명의 풀무질을 충만하게 가두고
안으로 눈뜬 초미의 주의력을 눚추지 않는 것
시간과 봄은 생명력의 배경일 뿐
역사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 인간의 시간 (창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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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3. 현대시인 20선 :
(1. 황지우, 2. 박노해, 3. 이성복, 4. 정호승, 5. 김명인, 6. 나희덕, 7. 장석남, 8. 황인숙, 9. 백무산)
10. 훔쳐가는 노래 (진은영)
지금 주머니에 있는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가난한 아가씨야
심장의 모래 속으로
푹푹 빠지는 너의 발을 꺼내주지
맙소사, 이토록 작은 두 발
고요한 물의 투명한 구두 위에 가만히 올려주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
널 사랑해주지 그러면
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
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
우리는 둘이서 밤새 만든
좁은 장소를 치우고
사랑의 기계를 지치도록 돌리고
급료를 전부 두 손의 슬픔으로 받은 여자 가정부처럼
지금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사랑해주지, 나의 가난한 처녀야
절망이 쓰레기를 쓸고 가는 강물처럼
너와 나, 쓰러진 몇몇을 데려갈 테지
도박판 푼돈처럼 사라질 테지
네 주머니에 있는 걸 다 줘, 그러면
ㅐ고개 숙이고 새해 첫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여인들의
경건하게 긴 목덜미에 내리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
그때 우리는 살아있었다
*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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