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밀리언셀러 시인 류시화의 등단작 (안재찬, 생활) :
生活
窓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어둠의 門을 열고
맨 처음 세상으로 나온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아침은 소리없이 움직임만으로 와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
四方에서 입술을 부비며 스며든다.
손바닥 위에 놓인 生의 조각들을 쪼아먹는
소망의 뜰에 내린 새 몇마리
앉아있다 날아간 자리
버리고 남은,
버릴 수 없이 슬픈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밤의 꿈으로 문질러두고
지금 窓을 닦고 있는 내 손길 아래
세상의 어느 한 곳이 닦여지고 있다.
톱밥처럼 흩어지는 日常의 책장들
良識은 굳은어깨뼈처럼 튼튼하지 못하고
길모퉁이에 잠복해 있는
먼지의 덫, 보이지 않는 손들의 굴레
一部分씩 닦여져 나간다.
빈 접시에 채우는 하루분의 양심과
빵 하나의 自由로 시작되는
이 아침, 햇빛은 하늘의 층계를 걸어내려와
無垢한 눈망울을 가진
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어디로 어디로 데려가는가.
아침의 門을 열고
맨 처음 밖으로 나온 아이의 두 눈
窓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어느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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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D-76.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100만부 이상의 시집을 판매한 시인들 목록을 보면 의외로 등단을 거친 시인들이 꽤 드물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역대 최고의 황금기라고 평가받곤 하는 1980년대만 해도 무려 세 명의 밀리언셀러 시인들이 있었는데, 이미 1984년에 가장 먼저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였던 박노해 시인을 비롯해 1989년에 이르기까지의 <홀로서기>를 쓴 서정윤 시인과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 등이 기억나는군요... 요즘도 베스트셀러 시집 분야를 보면 현 본격문학 진영에서 크게 주목을 받아온 시인들의 이름은 맨 아래에 겨우 하나 둘 정도만 오를 뿐, 대다수의 나머지 시집들은 '등단'을 거치지 않고 출간된 시집들인 경우가 태반이죠.
박노해 시인은 '시와 경제' 동인으로만 활동을 했었고 또 비록 '등단'을 거치긴 했어도 도종환 시인 역시 신춘문예가 아닌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데뷔를 하였으므로, 아마도 거의 유일한 신춘문예 당선자 출신의 밀리언셀러 시인으로는 딱 한 명 바로 류시화 시인이 있습니다. 워낙 많은 시집들을 출간하기도 했고 또 대부분 스타덤에 오를만큼 혁혁한 판매부수를 자랑해온 시인이기도 하죠. 하지만 신춘문예에서는 비교적 본격문학에 더 가깝다고 할 등단작으로 데뷔를 한 셈이겠습니다. (게다가 이 실력 또한 상당히 뛰어났던 편이어서 한번쯤은 따로 읊어둘만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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