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이정화, ‘골조의 미래’ ('당선작'의 최우선 전제조건 둘)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9. 18. 02:45

  
  
  

[베껴쓰고 다시읽기] '당선작'의 최우선 전제조건 둘 (이정화, 골조의 미래) :



골조의 미래


  

푹신한 의자와 비어 있는 벽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이 건네주는 사탕 두 알

공기가 더없이 건조해지고
서서히 등이 굽어질 때 묻는다

- 그 집이 제 것이 맞을까요

수년간 지어온 이 집엔 각별한 애정이 있지만
한 발만 들여도 금세 다시 지어야 할 만큼 형편없다

- 전 애인이 가져다준 벽돌 하나. 지문이 남은 채 굳어버린 시멘트. 이유 없이 생긴 자국들. 망치로 못을 내려칠 때 들었던 노래라든가. 한순간에 닫히는 문은 제 것이 아니었는데.

선생과 나는 동시에 나무 집을 만들어간다
니스칠 된 벽이나 바람이끼어들 수 없는 단단함을 떠올리며
코앞 사탕에 손을 뻗는다 사탕 껍질을 벗겨내 입안에 굴린다

- 함께 벽지를 발랐어요

이따금 거짓말이 필요하다
선생은 지금 나의 집을 짓고 있으니가

- 사탕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선생과 마주한다
서로의 집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긴 시선

돌이켜보면 내가 말한 집이라는 건 어디선가 발견될 수도 있다
그때 나는 그 집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지만

- 선생님, 그 집이 저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줄자로 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딱 이만큼이 너의 집이다......

사탕 껍질을 구기고 선생의 말을 기다린다
벽 너머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소리

- 그렇지만 모든 건 영원히 당신의 것이겠죠

나와 선생 사이 단단한 정적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노크 없는 문. 새것 같은 폐허에 깃드는 숨소리. 컴퓨터 작동. 선생 뒤에 여전히 깨긋한 유리와 어려운 형태의 오브제. 녹은 사탕이 혀 밑으로 미끄럽게 굴러가는데. 다시 선생과 눈을 마주한다. 등을 평평하게 편다.



# 2023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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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문예 D-74.

   요즘 시들이 좀 그렇죠? ㅎㅎ
   신춘문예 특집이긴 해도 이제 주요 문예지 신인공모가 더 주목을 받는 시대인만큼 올해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을 한 이정화의 작품을 한번 꺼냅니다.
   예전부터 '당선작'의 조건, 즉 일정한 형태의 '공식'에 관한 의문과 논란들이 제법 많았지만 결국 그 근본에는 크게 두가지 정도의 <핵심>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첫째는 다름아닌 '안정감'예요. 워낙 명멸하기 쉬운 문단 또 시단의 특성으로 인해 힘들여 뽑은 시인이 자칫 데뷔작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 채 숱하게 사라져간 이력들이 많습니다  어떻게든 그 생명력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겠는데, 이는 출품한 작품들간의 고른 수준과 '정서'의 일관성에 큰 비중과 주안점을 두게 되겠죠.
   아마도 둘째는 또 '시대정신'일 것 같아요. 신인다운 패기나 전혀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려면 아무래도 '기시감'을 어떻든간에 극복해야만 할 문제가 있겠죠. 이는 과거의 숱한 시인들이 지문처럼 새겨놓은 각각의 문체와 시풍을 얼마나 닮지 않았느냐, 완전히 새로운 그 무엇이냐를 놓고 따진다는 얘기인데요...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심사평에서 이제니 시인도 그 '억울함'에 대해 언급하기조차 했습니다. 좀 가혹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왜냐하면 기성 시인들끼리도 분명히 일정한 '교집합'들은 존재해왔으니까요.)
   자, 그렇다면 올해의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은 과연 어떻게 평가해볼 수 있을까요?
   첫째, 일단은 시를 풀어내는 솜씨나 태도 등은 상당 부분 '안정적'인 편입니다. 당장 저부터도 그 큰 유혹을 쉽게 떨치기가 힘든, 실험정신에만 앞서 조악한 수준에 그치게 되는 경우를 이 시인은 철저히 배격해놓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봅니다.
   둘째, 그렇다면 '참신함'의 문제에서는요? 글쎄요... 입니다. 이미 여러 기성작품들에서 쉽게 보아온 표현방식, 아니 어쩌면 더 익숙해진 듯한 말투나 시어들의 사용법 등이 오히려 큰 '기시감'만을 느끼게도 만드는데...  

   그렇다면 문학동네 심사자들은 아마도 '시대정신' 즉 새로운 시단의 미래를 고민하기보다는, 좀 더 '안정감'을 갖고 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동토에서 당장의 현실부터 좀 어떻게든 우선 살아남고 보려는 취지로 해당 선정기준을 두었겠지 싶은 생각도 좀 드네요...
   요즘 시단의 풍경을 엿볼만한 대목일 수도 있겠습니다.
   남은 휴일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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