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연작
- 그리움에 관한 것들 :
때때금 잊고 지낸 이름 밤늦게 불쑥 꺼내보면 더는 못 본 얼굴, 그 말투, 고된 표정들 아스라해 적막할 뿐
무덤덤히 달력을 넘기는 동안 이불속 바늘을 찾듯 조심스레 살펴온 기억들은 차례로 고독히 쌓여, 더는 위험하지 않아, 착각하며 계속 높게만 쌓였던 그것들 문드러지고 닳아 이젠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든 핏빛 멍울로도 남았고
누군가 또다시 호출할 적마다 섬찟 놀라며 이내 덮는 일기장처럼 내게도 그 시절의 치부라는 게 생겼을까
언젠가 부끄럽지 않도록 그 멍울 주위를 한참 들여다본 적 있었지 후회는 없어, 그 시절만이 답해줄 수 있는 무엇, 아껴둔 채 다시 천천히 지워야 해, 꾹꾹 눌러쓴 자국 위에 다시 연필촉으로만 남는 이름들
더는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생경한 빛깔의 붕대만 진작 손에 쥔 채 전화는 또다시 부재중
처음,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어
후두둑 후두둑 검정 우산 속에서 한참 비를 맞았어
어느 봄날, 화사한 연분홍 벚나무 아래 지던 꽃잎처럼 웃던 너 한참 자전거를 탄 게 기억났어 모든 풍경을 반사하던 물빛이 네 얼굴에 스칠 때 그만 고개를 돌렸는데, 며칠 전 아침엔 혼자 조그만 고래의 몸짓을 한참 쳐다봤어 내 얼굴이 비치던 물빛
사람들은 쉽게 종이를 찢곤 해 차마 종이에 적지 못했던 말을 전화기에 대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훔쳐 읽었어, 아무 말이 없었던 몇 초의 침묵은 시계를 정지시켰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어
봄비는 평등해, 모든 사람들이 비를 맞잖아
하며 웃던 모습이 떠올랐어 평등은 좌파적 발상이라며 금기로 만든 시간들 어느새 죄책감으로 이만큼 쌓여 있어, 도무지 기억도 못할 세월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 평등은 아름다운 건데 아름답지가 못했어
평등을 비웃던 사람들도 이젠 더 이상 집회를 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냉담한 시선 잠시만 보아달라며 외치던 함성은 마치 초등학생들 같아 유치해졌어, 확성기가 모든 목소리를 대체한 시대
21세기의 봄비가 왜 평등해야 하냐며 따져 묻던 네게
지금 내리는 이 비도 불평등해야 할까를 되묻는 나는
비를 기다리던 우산장수와 선인장을 걱정하던 꽃장수를 애도하며
오늘도 한참 비를 맞고 있어 비는 결코 평등하지 않아
그래, 혼자 또 자전거를 탔어
그날도 화사한 벚꽃이 하나둘 지던 날, 아침부터 와락 안았던 눈물
희뿌연 시야, 구불구불한 도로, 미끄러지듯 자전거를 타다 이젠 그만 타고 싶어졌어
그래서 넘어졌어
그만 보고싶어서
두번, 기다리지 않는 시간은
그 여름, 외딴 연못가와 심드렁히 나누던 얘기를 불쑥 기억해냈어
군복을 입던 그와 군복을 싫어했던 내 얘기도 덩달아 했던 기억이
연못에 둥둥 떠다니던 詩를 봤어 두툼한 한지 위에 씌어진 글귀들
그렇게 둥둥 떠다니던 물 위로 반짝이며 고였던 눈물도 기억했어
서늘한 바람 하나 없던, 무더웠던 그늘 밑 연신 발그레하던 얼굴
때때로 사람들이 철 지난 노래를 더는 떠올리지 말자며 얘기를 해
요즘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 뉴진스는 곧 빌보드 1위도 한다는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탈 줄은 다들 몰랐으면서 문학도 아니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은 제목부터가 '시적'이잖아, 또 말을 해
문학이 대체 뭔데? 하며 묻던 내 말투는 다분히 공격적이기만 해
뭘 자꾸 묻냐며 다시 입을 닫던, 네 詩을 읽었던 가을의 기억들도
다시 봄이 오면 그 연못가가 문득 생각나서 자전거를 타고 달렸어
또 넘어졌어, 무릎이 까지고 피도 뚝뚝 흘렸어 그래도 계속 달려
다시 연못가에 다다르면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그곳,
조용히 세월 밑으로 흐르고
세번, 저무는 강가에서
한 시대가 저무는 소리가 들렸어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이 타임캡슐로 들어간다던 뉴스도 벌써 20년이 지났고
스마트폰이 점령한 지구는 자전거보다 더 빨라 이젠 자동차를 추월하고
자동차는 화석연료를 벗어던지지 못해 아직도 매연이 자욱하고
털 빠진 개들이 웅웅대던 골목 어귀, 다닥다닥 붙던 포스터들도 철 지난 유행
그렇게 어수선히 한 시대가 저무는 소리를 듣고 있어
대학로 연극들이 자본주의를 논하던 와중에도 굶주려 죽는 배우가 생겨났고
예술가들한테 기본소득을 주자던 주장은 헛된 공산주의자의 포퓰리즘이라며
연봉 1억이 넘는다던 은행들마다 구조조정에 온 힘을 다하는 2023년의 여름,
챗GPT가 시인들의 자리를 대체하고 학생들이 작문 과외를 단톡방에서 받고
무료잖아, 시도 이제 무료가 될 거야, 호기롭게 떠든 한 중년의 신사도 떠났고
연봉 2천만원도 안될 시집이 국내 최고 베스트셀러가 됐고 강연회를 연 여름
저무는 강가에 이는 바람
흩날리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노래를 부르는 듯 네 목소리가 들려
난 그만 또다시 눈을 감았지
서늘하지 않은 바람이 훅 불었지
네번, 지난해의 봄비를 맞다
전화벨이 울렸고
여보세요
말이 없었지
번호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웬 침묵이냐
나도 말이 없고 없어졌지
그렇게 1분
뚝 끊어졌어
가슴이 뻐근해 눈물이 돋았어
다섯 연, 연관과 질서에 관한 답
그해 여름, 오랜 장마의 끝
그대랑 단둘이 거닐던 고성 바닷가 절벽에서 언뜻 무지개를 바라보았지 넘실대는 파도, 찬연하기만 했던 오색빛 사이로 희미하게 푸르던 전운, 그걸 감싸 안아보려 했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그 기억을 묻던 이가 없었는데 남몰래 적던 일기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름, 누구지, 하면서도 내내 지나쳤던 모양인데 기억을 망각한 사이에 스치듯 지나친 순간들도 많았는데
포연이 수북이 쌓인 서울
무참히 폐허가 된 도시는 진작 떠났어야 할 곳인지 몰라 내내 그대만을 기다렸나 봐 아득해진 머리 위로 또다시 비행기 몇 대, 포차들이 요란스럽게 이동하고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세월이 흐른 동안만큼
아무도 이 전쟁을 믿지 않았었는데 매일 떠들던 뉴스들도, 각종 전문가들도, 하다못해 시인들까지도 애써 외면한 결과인데 입시와 마약과 야당과의 부질없는 전쟁만을 일삼았는데
연관과 질서는 그때, 이미
권태와 속단을 금기시하려 만든 십계명이었나 몰라 때때로 궁핍한 육신들이 찾던 예배당 옆 배식대에서 나란히 줄을 섰다가도 이내 배를 채우면 냅다 도망치기만 한 그것들도 어쩌면 희망이었을까
연민과 질정은 늘 곁에 있었는데,
견뎌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
여섯군데, 다시 전철역 앞에서
4월의 섭씨 28도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땡볕 속 대로변을 걸었고 건물 입구에 즐비한 노점상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줄기는 이내 그늘을 향해 숨었고, 지나치는 차들의 경적소리도 어젯밤의 높은 목청처럼 망각이 된 채 저만치 사라졌고
( 빈 연을 채우시오* )
메마른 얼굴 위로 눈부신 화장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면 때마침 열차가 등장하곤 했고 스르르 열리는 스크린 도어 RH 8분 간격의 상영시간은 그저 촉박할 뿐이기에 다들 바삐 관람석을 향해 뛰기 시작하고
이윽고 출발하는 서울행 비둘기호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른 아침부터 크게 혼잣말을 연신 중얼거리는 주연배우는 독백인가 방백인가, 관객들의 표정은 심드렁한 채 저마다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향해 기도하는 시간 예수님이 설령 있어도 크게 달라지진 않을 풍경
* 간밤에 나눴던 통화를 잊어보고자 걸음들은 바삐 골목으로 사라졌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다시 나타나는 모퉁이, 기억과 망각 사이의 경계, 그 경계를 지나칠 적마다 한 살씩 나이를 더 먹었는가 봐
일곱번째 비, 곡우
청명과 입하 사이
청명하기만 한 하늘이 여름을 향하고
봄날은 시나브로 절정을 향해 치닫는
그 밤, 문득 비가 내렸지
잊혀진 노랫말처럼 구슬픈 가락으로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는 협화음,
그 그리움이 맞던 봄날
우산을 쓰지도 않은 까치가 날아올라
후두둑 빗물을 털어낸 나뭇가지에도
벚꽃이 쓴 편지를 건네는 라일락처럼
그윽한 향, 봄비에 스며들고
이별은 연습할수록 재미도 있겠지만
봄비는 맞을수록 치명적이기만 해서
곡우, 애써 피하며 걷고 있는 아침에
여드레 동안, 오월
불안과 미래는 자웅동체라고
자잘한 일상이 외면한 것들은
사월이 잔인한 달이야? 그러면
오월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슬로우 록이라고 12분 음표 세대
황인찬 시가 백자를 닮았단 서평에
5천원짜리 흰 요강이네 친구가 웃고
관조의 아킬레스건이 허무개그일까?
요강보단 더 나은 시를 써야지 했는데
( 빈 연을 채우시오* )
하물며 출근하는 전철 안 뉴스
도무지 정체 모를 도덕, 진실
가십거리가 된 채 속삭이고
시답지 않은 시, 쓰겠다고
애꿎은 스마트폰만 끄적
정동진 일출 사진 한 장
감상하세요, 오월엔
눈이 시리게 맑은
샘물이 고이는
안목의 그늘
달항아리
* 생각해 보니,
시대정신이라는 낱말, 너무 어려워
그래서 자잘한 일상들만 빼곡한데
불안한 미래는 좀체 대답을 않고
이마엔 나이테들만 깊게 파이고
아홉 번을 봄, 책으로 쌓은 탑
GPT4가 분당 이천 타를 넘어선 올해, 소설 생산량이 역대최고치를 기록했고 누군가는 말했지 곧 작가들이 멸망할 거라며 혹은 읽어봤겠지 아직 걱정할 수준이 아니라며
한 비평가에게 따져 물었어 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말이죠 사상, 감정, 교감 같은 걸 로봇이 하나요? 나직이 속삭이듯 그에게 던진 말이 그새 부메랑이 돼 내 발등을 스치고
제너레이팅은 더 이상 작가가 아니야, 로봇의 생산성이 월등하게 더 높잖아 이윽고 수천 수만 권의 책들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고
아직 퇴고가 남았어, 한 작가가 퉁명스레 내뱉는데
벌써 비평을 시작한 GPT4는 웃으며 평론집을 건넨다 봐, 알레고리는 결국 딜레마였지 미래파를 이긴 사조는 로봇이 됐잖아 훨씬 건조하고 영원해 그치?
미래파가 문제였구나, 아뿔싸, 하는 순간에도 로봇이 쏟아낸 김소월과 윤동주가 슬며시 또 웃는데 끔찍해, 싫어, 자동차를 조립하던 로봇한텐 거부감이 안 들잖아
알튀세르와 그람시가 했던 말들도 다 소용없어졌어 벤야민이 낫겠지? 정치적이어야만 돼, 왜 국산은 없는 거여 그게 문제여 한 충청도 선비도 따라 웃었고
아직 편집이 남았잖아, 편집이 곧 퇴고지 뭘
로봇을 이겨보겠다는 발상부터가 이미 바벨탑인 걸까, 자본의 힘은 이토록 막강하고 두렵고 몰염치한 걸까
굶어죽겠네... 기본소득이라도 내놔
열 번의,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폭염
오월의 중순을 흩뿌린 녹음이 벌써 그늘을 만들고, 후드득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데,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문밖에 잠시 서있는 동안은 그 말을 중얼거렸나
엘리베이터
퀴퀴한 냄새가 아직 덜 빠진 좁은 방안에 세 명이 나란히 섰고 한 명은 메신저를 또 하나는 동영상을 쳐다보고 귓속에 살랑대는 전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이 밤
왠지 그대가 남긴 술잔에도 이슬이 맺힐 것 같아 식탁 위에 둔 걸 기억해냈어 아직도 안녕한가를 묻고
그저
그렇게 설렘이 진 얼굴엔 지친 일상이 또아리를 틀었고, 마지막 버튼이 울리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고 한 명은 핸드폰을 이내 덮고 내렸고 또 하나는 동영상이 여전히 시끄러울 뿐
사랑은
현관문을 열고 캄캄한 방안을 파고드는데 창밖에 내리는 비도 유리창에 방울방울 영글고 그 뽀얀 입김을 기다렸을까 종일을 아렸던 가슴에서 내놓는 눈물도 이내
빗물 같아요*
* 1989년, 전영록 작곡
- 모자이크, 다짐의 지평선 :
때로는 다짐도 하건만*
사랑의 미로 같은 세월 속에도
자전거 한대, 낡은 상징이었지
오월의 삼십 도가 무르익을 때
바람 부는 한강변을 산책하고파
바람이 없다면 가지 말아야 해
그게 더 좋겠어
다시 전철 안
빼곡한 사람들한테 쏟아진 햇빛
축복보다는 재앙에 가까운 체제
그 체제의 밝음, 도 기억해 둬
곧 소멸할 테니까
전철 위로 불쑥 솟는 지평선*
금세 컴컴해지는 동굴 속
편지에서 진주가 돋아
기억을 꺼내봤어
사랑한다고
* 1984년과 2023년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