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5. 18. 16:18

   

   그해 여름은 이렇게 끝나버리고 

      
 
   
   태풍이 무질서하게 지나갔다
   사람들 하나둘 긴 소매를 입기 시작했고
   저마다 푸르른 그늘을 안고 나선다
   이곳 인적이 드문 광장엔 여름부터
   장마를 견뎌오던 플랭카드만 남아 있어
   그 때묻은 천마다 피로가 역력하고
   여대생이란 팻말을 든 아가씨들이
   멀찌감치 피안의 저녁으로 사라지는 동안
   내게선 가뭄 한번 제대로 일지 않았었다
   그 부우연 얼굴 언저리엔 소나기도 잦아
   언제고 한번 그을린 적 없는 상처
   밤마다 모기와 싸우는 옆집 부부와
   자가용마다 매단 접촉사고만큼
   눅눅한 습관에 젖어버린 내 방안엔
   오늘도 무사태평해야 할 그리움만 남는데
   언제고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 머릿수만큼
   마음속 상처들은 깊게 멍을 그리고
   멍자국을 따라 푸르게 패인 손금
   손금들이 망각의 철교 위에 또렷하고
   그 철교 너머 쏜살같이 달리는 여름은
   이제 막 차양막을 내려버리는 모양이다
   아, 길지도 않았던 무더운 저녁이
   점점 수그러들고 목숨을 잃어가고
   그 잔혹한 운명 앞에 진 치고 앉은
   내 허기진 추억들이 비를 맞는다
   이런 비는 처음이야
   하면서도 저마다 안주하지 못하는만큼
   낡은 수첩에서 하나씩 이름을 지우고
   다시 사람들 우산을 털며 바삐 떠나가면
   그 물묻은 자리마다 반사되는 석양
   공중전화박스마다 견고한 고독을 쌓아가고
   덧없이 불쑥불쑥 자라는 그 그림자처럼
   그해 여름도 너무 쉽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