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은 모르게
왼손은 수십 개의 사소한 실망들을 알고 있다. 왼손은
조금 더 가까운 데서 생각한다. 왼손은
먼저 떨린다.
지붕 위에 내려앉는 새들의 무게와 함께
밤의 이동속도로
나의 왼쪽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리는 기색.
왼손에겐 친구가 필요해.
아주 분명한 친구.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목으로
악수를 청하는 친구.
왼손이 좋아하는 것은
갑자기 왼손이 되는 것.
안개야 양떼처럼 흩어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 왼손은 사냥개가 되는 것.
그것에 꽂히는 것.
매일 오른손도 모르게
왼손이 사라진다.
세어야 할 것들이 많은데
가리켜야 할 것들이 많은데
스르르 펴진 뒤에 왼손은
낯선 이에게 인사하는 데 천재.
쥐락펴락 혼자 손금을 만들다가 불현듯
그것이 되는 것 역시.
한낮의 거리에서 당신과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당신의 손바닥을 뚫고 튀어나간
나의 왼손은.
# 이장욱, 생년월일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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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많은 대화창들을 오가며 느낀 생각들은 제 아무리 '정치적' 담화를 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머릿속은 온통 '정치적' 의견들일 뿐이라는 사실일 것 같아요... 대선 선거운동도 아니고 특히 제 정견 따위를 발표할 일도 아니겠지만, 몇 마디 좀 적어두고자 합니다.
진은영 시인이 시들을 소개한 책인 예담의 <시시하다> (위즈덤하우스, 2016) 중에서 한 편 고른 게 하필 이장욱 시인입니다. 진은영 시인은 이 시를 놓고 '왼손이 갖는 욕망'을 풀이했다면 반대로 이번 대선을 지켜보는 제 심경은 그 '왼손이 처음 갖게 될 새로운 세상'에 관한 이야기일 것 같기도 해서요...
현재의 판세를 놓고 본다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쩌면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이제 막 첫발을 내딛는 오늘이 될 것 같습니다. 가장 유력한 두 거대정당의 후보들은 모두 젊은 시절의 노동자 또는 노동운동가 출신에 과거 '운동권'들의 주류였던 NL계열 (민족해방, 통일운동 중심)보다는 특히 PD계열 (민중민주, 노동운동 중심)에 더 지향점을 두고 있다는 공통된 이력과 면모를 갖습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능가하는, 가장 '왼편'에 서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흔히들 '좌파'라 일컫는 민주노동당보다도 오히려 더 '왼편'에 서 있는 이념과 사상을 갖고 있는, 혹은 가졌던 인물들이기도 하고요.) 혹자들은 이를 놓고 "빨갱이 천국"이라거나 "내란의 부활"로도 손가락질을 해댔겠지만, 두 후보 모두 과거의 이력들을 본다면 그리 섣불리 단정 지을만한 '허접한' 인물들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는 유년 시절부터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산업재해까지 입은 경험이 있으며, 가난한 고학 시절을 통해 변호사로까지 변신했던 이력을 갖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어렸을 적에 힘겹게 자라온 덕분에 그늘진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씨가 늘 있다"는 우호적 평가가 가능해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지난 대선 때부터 줄곧 주창해온 '기본소득' 관련 논의는 그 많은 논란과 비판 속에도 여전히 충분히 유효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담화라는 생각도 듭니다.
또 한 명의 경쟁상대인 후보 역시 80년대 운동권들한테는 한때 추앙받던, 하필 PD계열과는 가장 상극인 서울대 경영학과 (공교롭게도 PD계열의 대부 격인 연세대 오세철 교수 역시 경영학과 교수이긴 합니다만) 출신에 꽤 오랜 기간을 현장에 직접 투신해 노동운동을 한 전력이 있었고,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를 했으며 1992년 대선에서도 일명 '백선본' (백기완 민중대통령 선거대책본부?의 준말)에서 활동한 전력을 갖습니다. 역시 유시민 작가와도 인연이 깊은데 대선의 참패 후 큰 좌절을 느껴 은둔하며 지내던 시절의 그를 찾아간 유시민 작가의 민주당 입당 제의를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죠... 그가 남긴 "내 노선은 틀렸고 오류였다"는 고백이 비록 과거 운동권들한텐 처절한 '배신자'로서의 낙인이 된 점도 묵과할 순 없지만, 그래도 살아온 이력 자체가 현 소속정당의 인물들과는 제법 차원이 다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정당이 아닌 인물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과거의 후보들과는 사뭇 다른 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비교적 안심하고 찍을만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게 설령 "빨갱이 천국"이 될지언정 지금의 사회보다 더 못한 세상이 되리라는 걱정은 애당초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또 설령 그게 혹 "내란의 부활"이 된다손쳐도 지난 정부의 독선과 오만보다는 훨씬 더 겸허해지고 인간적으로도 나은 모습일 것 같다는 일말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만, 늘 그 후보의 됨됨이보다는 그 소속 정치세력들이 더 큰 근본적인 문제이긴 합니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
그토록 위험하다며, 불온하다며, 또는 이미 '안 될 일'이라며 서로들 만류해온... 과거의 의병운동이 그랬고, 독립운동이 그랬고, 5·18 광주가 그랬고, 민주화운동이 그랬고,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가 그랬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사회가 그 '왼편'으로 크게 한걸음 더 다가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전혀 두렵지도 걱정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더 '잘 된 일'이 될 것 같기에 몇 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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