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김중일,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단테, 연분홍/연초록, 정독, 그리고 종로학파 2024. 1. 25. 07:12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적 '효용'에 관한 물음과 유별난 '취미' 활동 :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튼튼한 집이 남지만
   열심히 밤새 지은 '시'라는 채널의 관건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나누고 허무는가에 달렸다.

   아침 해와 함께 흔적 없이 증발하는
   실체가 남지 않는 일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큰 직업'은 직업이 아니라는 뜻이 분명하다.

   무작위로 배정되는 한 편의 채널에 접속을 기다리며 들었던 상념들을 서로 나누며
   빨래 개기를 마친 너는 노동의 대가로 배달 음식을 시킨다.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함께 있는 공간을 둘러보며 한 마디 덧붙인다.

   이런 수십 개의 채널을 모아놓은 한 권의 시집은 말이야
   다림질까지 한 듯 기막히게 반듯이 개어놓은 시인의 속옷 같단 말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표백제로는 아무리 빨아도 결코 다 빠지지 않는 슬픔의 때가 미량이나마 껴 있어서. 결국 죽을 때까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다시 빨아야 하는.

   빨다가 갑자기 눈물이 툭 터질 정도로 허무하기가 그 어떤 시적 수사로도 비유할 수 없는.


   * 김중일,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문지, 2022)


   며칠째 계속된 추위에도 어김없이 일상은 유지한 채 글쓰기만 지지부진한 까닭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월급날 새벽에 온라인으로 꽂힌 금액을 확인하며 이달도 무사히 버텨냈음을 감사히 할 25일. 시를 쓰지 않아야 벌 수 있는 돈이기에 더더욱 그 생각만 앞섰던 모양입니다.  
   21세기에 등단을 했으니 제법 '신예'에 가까울 김중일 시인도 벌써 데뷔 23년차가 됩니다.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시에서 시인은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을 향한 구애의 몸짓을 연신 해대지만, 스스로 "실체가 남지 않는 일"임도 인정하고야 맙니다. 그 "허무하기"가 비단 문학에만 국한된 건 아니라는, 모든 예술분야가 함께 겪고 있는 동병상련이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게 더 이상 어떤 '특권'도 되지 못한다는 일은, 포스트모던 더 나아가 '키치'가 갖는 문화적 풍토에서의 어떤 한 '민주주의'일 수도 있는 법입니다. 오로지 정진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그래서 정당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반대로, 가장 유명세를 탄 시인들조차 학교의 강단이나 온라인 창작교습소 또는 인스타그램에서의 마케팅 등을 기민하게 활용해야만 비로소 돈을 벌어 먹고 산다는 현실은 시인의 말처럼 과연 "시인이 직업일까?" 하는 의아심을 품기에도 충분합니다.
   '시인'은 직업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유별난 '취미' 활동이 됩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렇다면, 왜 글을 쓰는가? 이유가 없는 글쓰기는 그저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겠죠.
   시론이, 문학론이, 사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가야금 소리를 다시 한 번 듣습니다  
   오늘도 의미있는 하루 되십시오.
  
  
  
   https://youtu.be/1DCPqQA0_Gs?si=h7mUMujpfhEz5qG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