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박형준과 정호승의 변증법적 통일 :
소멸하는 밤
흰 어둠이 잠들지 않는 거리,
나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
지난 사랑이 모두 헐거워지는 창문 아래,
눈물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
그러니 우리를 울게 하는 것들은
힘껏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는 것입니까,
어둠을 지우려 우는 별자리들이
느리게 첫눈으로 떨어집니다.
겨울 구름 위로 숨 하고 내미는 입술,
흰 두 뺨이 젖듯이,
베갯잇에서 우우 하고 우는 얼굴,
가장 죽고 싶을 때와 가장 살고 싶을 때의 얼굴은
밤마다 꿈속에서 끝없이 다가오는 얼굴들,
죽은 아이들과 죽은 엄마들과
죽은 모두가 투명한 이파리처럼 흔들릴 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추모는 내가 할 수 없어서 나는 슬퍼야 합니까,
낯빛들이 피어오르는 숲,
별자리는 어둠 속에 죽은 나를 벗어놓습니다.
나를 사랑했던 만큼 당신의 얼굴에서
나는 잠시만 슬플 수 있겠습니까.
두 뺨에 떨어트리는 당신의 울음과
등 뒤로 쏟아지는 정오의 빛이
오래도록 눈매에서 머물다 갈 때,
나를 붙든 시간에 모두 울어버렸습니다.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슬픔이 있어,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울지 않은 사람처럼,
한 묶음 목화를 들고 내게 와주세요.
나는 이곳에 서성이다 당신의 차례를
말없이 나는 기다릴 뿐이에요,
당신의 꿈속에서 서 있을 뿐이에요.
내가 없는 당신의 곁,
밤의 창가에는
너무 많은 슬픔이 유리알처럼 글썽이고.
* 정현우, 소멸하는 밤 (현대문학, 2023)
권두시인 '너는 모른다'로 잘 알려진 정현우 시인의 두번째 시집인 이 "핀PIN" 시리즈가 이제 겨우 48권 (가장 마지막 호는 유희경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조금 놀랍기도 한데, 아무튼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예지 중 하나인 <현대문학> 역시 시집들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다는 건 조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2015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한 10년차 시인이라면 응당 김수영 문학상 후보에도 오를만한 경력인데, 시어들의 특색은 매우 서정적인 편이라서 가장 최근의 트렌드를 주도할 법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명사들이 형용하는 시상의 전개'는 두드러진 최근의 시작법들 중 하나일 텐데, 결국 "어둠"과 "눈"과 "하늘"과 "얼굴"이 맞닿는 곳에서의 슬픔들은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단 한차례도 사용하지 않음을 역설할 뿐이겠습니다. (중진들의 경우로 치면 박형준 식의 수사와 정호승 식의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매번 '고전'을 강조하는 연유이기도 합니다.) 설명보다는 작품 자체가 읽기 편하므로, 군살은 빼도록 합니다.
수은주가 영하 두자리를 기록하고 있는 요즘임에도, 새벽에 바라본 달은 둥그러니 보름철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불과 보름 정도만을 남겨놓는 설날 연휴를 함께 상기하게 되면서부터 금세 마음도 바빠지는 때입니다. 따로 알려드릴 것까진 없어 생략해온 연초의 몇몇 동인지들이 내건 공모전들도 있겠고, 또 내달부터는 다시 전국단위 공모전이 제 일정에 돌입하게 되는 시즌입니다. (첫번째가 아마도 <현대문학> 그리고 <현대시>와 <문학과 사회> 정도의 순일 것 같습니다.)
고뿔에 걸린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날씨를 감안해 건강도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대금 연주곡을 하나 듣겠습니다.
https://youtu.be/mjD2NctL3uk?si=p6vZ_bsXr1lWC6H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