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껴쓰고 다시읽기] 말을 줄여가는 시절 :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김명인, 길의 침묵 (문지, 1999)
영하 14도라는 기록적인 추위,
아랑곳없이 붐비는 전철 안에서 시간에 쫓긴 필사 (또는 복사 및 붙여넣기) 작업은 매번 실수를 연발하게 됩니다. 노트북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인류가 입력 인터페이스를 아주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분당 3천 타를 가볍게 능가하고 있는 AI의 대유행도 꽤나 오랫동안 요란스러울 전망입니다.
현대시를 잘 쓰려면 '조현병' 환자가 되어야 한다? 희한한 얘기들을 한참 들었기도 했는데, 무려 20년 넘게 투병중인 한 시인의 시집이 40년 넘게 베스트셀러를 기록중이기도 하며 하필 출근길에 마주친 한 조현병 환자의 시끄러운 넋두리는 최근 신춘문예 당선작들의 읊조림과 황인찬의 건조과풍 워딩과 이제니의 라면식 행갈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아주 쓸쓸한 얘기들입니다. (후배들한테 "앞으로 시에서는 절대 욕하지 말라"고도 가르쳤는데, 온통 찰진 욕들을 써댄 박참새의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며 더는 할 말도 잊습니다.)
아주 오래된 시인들 중 김명인 시인을 떠올렸습니다. 지난 세기말에 펴낸 시집에서 그가 말했던 '침묵'을 꺼내본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유행이 첨단이 되고 대세가 된다는 걸 알지만, 잘 어울리지도 않을 패션에 대해선 가끔 아예 무관심한 편도 썩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가까이 할 건 오로지 '클래식'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혀 '현대적'이진 못하다 해도 말입니다.
추운 날씨인데 건강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CZOrq94Y6Uc?si=NaLE8jogAM11cCm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