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노트

조정권, '산정묘지 1' ('시정신'에 관한 한 교범 또는 '천로역정')

단테, 정독... '종로학파' 2023. 10. 11. 05:20




[베껴쓰고 다시읽기] '시정신'에 관한 한 교범 또는 '천로역정' (조정권, 산정묘지 1) :

  
신춘문예, D-50.

"산시(山詩)를 쓰는 사람들은 '절대고독'을 아는 사람들이다." 주간경향에 실렸던 한 칼럼에서 조정권 시인을 다룬 대목입니다.
새벽공기가 차갑습니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날씨가 이제 곧 단풍을 알릴 것 같은 기별을 해오면, 접어둔 공책을 꺼내 아주 오래된 시들을 다시 찾아 읽습니다. 그윽하다는 말, 불멸의 시편들만이 갖는 거의 유일한 특권이기도 합니다.
황지우가 심사평에서 "놀랍도록 진지함"을 김수영의 시정신에 빗대 추천한 이 작품에서 시인은 정신세계의 고결함을, 그 고독을, 그 절망의 깊이와 의지의 견고함을 노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학의 첫째 봉우리인 '숭고미'를 발견해내는 일은 퍽 어려운 일입니다만, 어쩌면 그의 시편들과 또 비슷한 시절을 풍미했던 황지우, 김명인, 임동확 등이 함께 피력해온 '화엄'의 웅장함 등은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볼 법한 세계관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김정웅의 "천로역정, 또는" 역시 엇비슷한 시도로 읽어낸 경험을 갖기도 합니다.)
이미 타계한 시인의 노래는 어느덧 한 편의 '고전'이 된 채 신춘문예라는 등대 앞을 휘젓는 한 척의 나룻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유히 헤엄치는 그 안내의 흔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월, 새벽입니다. ;


산정묘지(山頂墓地) 1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1991년 제1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